윤회(輪廻)가 없다면,
죽으면 그만인가?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부처님은 윤회(輪廻)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글을 읽고, ‘불교는 무아(無我)를 주장하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세계를 부정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을까?
우리는 형색을 지닌 몸(色)을 자아(自我)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행동하려는 의지(行), 분별하는 마음(識)을 자아(自我)라고 생각한다. 중생들은 형색을 지닌 몸(色) 속에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의도하고(行) 인식하는 마음(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자아(自我)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자아(自我)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형성된 분별하는 마음(識)으로 경험함으로써(觸) 발생한 관념들일 뿐, 실재하는 자아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자아라는 관념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 아상(我想)이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을 자아로 취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 즉 아상(我想)이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망상(妄想)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르쳤다. 부처님께서는 오온(五蘊)을 자아로 생각하는 망상(我想)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삶은 괴롭다는 사실(苦聖諦)과 무명(無明)에 휩싸여 오온(五蘊)을 자아(自我)로 취해 살아가는 중생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苦集聖諦)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오온(五蘊)을 자아로 생각하는 망상(我想)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苦滅聖諦)과 오온(五蘊)을 자아로 생각하는 망상(我想)을 버리고 살아가는 길(苦滅道聖諦)을 깨달아 가르치신 것이다. 불교에서 소멸해야 할 괴로움은 오온(五蘊)을 자아로 생각하는 망상(妄想), 즉 아상(我想)이다.
아상(我想)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生死)이고, 윤회(輪廻)이고, 괴로움이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아상(我想)을 버리는 일이다. 아상(我想)이 망상(妄想)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아상(我想)을 버리는 것이 열반일 뿐, 중생들이 생사를 벗어나서 들어가야 할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중생들은 나라는 존재, 즉 자아(自我)가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몸을 받아서 태어나 늙어 죽는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할까, 무한할까?’,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할까, 무한할까?’, ‘우리의 생명은 살아 있는 육신을 의미하는 것일까, 육신 속에 살고 있는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일까?’, ‘생사(生死)를 극복한 여래(如來)는 사후(死後)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태어나서 죽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태어나고, 죽어서 갈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자아(自我)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러한 모순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 모든 논쟁은 모순 가운데 하나를 취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순된 견해를 취하지 않는 부처님의 위대한 침묵, 즉 무기(無記)를 살펴보아야 한다. 『맛지마 니까야』 72. Aggivacchagotta-sutta(악기왓차곳따에게 설하신 경)에서 부처님은 모순된 견해를 취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한때 세존께서는 싸왓티의 제따와나 아나타삔디까 승원(僧園)에 머무시었습니다.
그때 편력 수행자 왓차곳따(Vacchagotta)가 세존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존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공손한 인사말을 나눈 후에 한쪽에 앉았습니다. 한쪽에 앉은 편력 수행자 왓차곳따가 세존께 말씀드렸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세계는 상주(常住)한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세계는 상주(常住)하지 않는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생명과 육신은 같은 것이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생명과 육신은 서로 다른 것이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한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러한 여러 모순된 견해 가운데 어떤 것이 고따마 존자가 (사변思辨에 의해서) 도달한 견해입니까?”
“왓차여, 나에게는 그런 (사변思辨에 의해서) 도달한 견해가 없다오.”
(중략)
“고따마 존자여, 고따마 존자는 나의 질문을 받고, 모든 질문에 ‘왓차여, 나에게는 그런 사변(思辨)에 의한 도달한 견해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따마 존자는 어떤 위험을 간파하고 있기에 이와 같이 이 모든 견해들을 멀리하십니까?”
“왓차여, ‘세계는 상주한다’는 견해와 같은 사변에 의해 도달한 견해는 (소통할 수 없는) 밀림 같은 견해이며, (실천할 수 없는) 황야 같은 견해이며,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동치는 견해이며, 분쟁을 일으키는 편견이며, 속박하는 견해로서, 괴로움을 수반하고, 곤혹스러움을 수반하고, 불안을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한다오. 그리고 염리(厭離), 이욕(離欲), 멸진(滅盡), 적정(寂靜), 체험적 지혜(勝智), 정각(正覺), 열반(涅槃)으로 이끌지 않는다오. 사변(思辨)에 의한 다른 견해들도 마찬가지라오. 왓차여, 나는 이러한 위험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 모든 사변(思辨)에 의한 도달한 견해들을 멀리한다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에게는 어떤 사변(思辨)에 의해 도달한 견해가 있습니까?”
“왓차여, 여래에게는 ‘사변(思辨)에 의한 견해’ 바로 그것이 제거되었다오. 왓차여, 여래가 본 것은 이런 것이라오. ‘형색(色)은 이러하다’, ‘형색(色)은 이렇게 모인다(集)’, ‘형색(色)은 이렇게 사라진다(滅)’, ‘느끼는 마음(受)은 이러하다’, ‘느끼는 마음(受)은 이렇게 모인다(集)’, ‘느끼는 마음(受)은 이렇게 사라진다(滅)’, ‘생각하는 마음(想)은 이러하다’, ‘생각하는 마음(想)은 이렇게 모인다(集)’, ‘생각하는 마음(想)은 이렇게 사라진다(滅)’, ‘조작하는 행위(行)들은 이러하다’, ‘조작하는 행위(行)들은 이렇게 모인다(集)’, ‘조작하는 행위(行)들은 이렇게 사라진다(滅)’, ‘분별하는 마음(識)은 이러하다’, ‘분별하는 마음(識)은 이렇게 모인다(集)’, ‘분별하는 마음(識)은 이렇게 사라진다(滅)’ 그래서 ‘여래는 모든 환상과 모든 혼란과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잠재(潛在)하는 모든 아만(我慢)을 파괴하고, 소멸하고, 단념하고, 포기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했다’라고 나는 말한다오.”
“고따마 존자여,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어디에 가서 태어납니까?”
“왓차여, ‘가서 태어난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오.”
“고따마 존자여, 그렇다면 가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왓차여, ‘가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오.”
“고따마 존자여, 그렇다면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가서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까?”
“왓차여,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가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오.”
“고따마 존자여, 그렇다면 가서 태어나지도 않고, 가서 태어나지 않지도 않습니까?”
“왓차여, ‘가서 태어나지도 않고, 가서 태어나지 않지도 않는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오.”
“고따마 존자여, 고따마 존자께서는 제가 묻는 모든 질문에 대해, 그 질문들이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알 수가 없고, 이 점에 대하여 당혹스럽습니다. 이전에 고따마 존자와의 대화를 통해 저에게 있었던 신뢰마저 지금 저에게 사라졌습니다.”
“왓차여,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가 물을 것이니, 그대는 적당한 대답을 하도록 하시오. 왓차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그대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면, 그대는 ‘이 불이 내 앞에서 타고 있다’라고 알 수 있겠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약 내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면, 저는 ‘이 불이 내 앞에서 타고 있다’라고 알 수 있습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약에 ‘그대 앞에서 타고 있는 이 불은 무엇을 의지하여 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왓차여,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약 저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저는 ‘내 앞에서 타고 있는 이 불은 풀이나 장작 같은 연료를 의지하여 타고 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왓차여, 만약 그대 앞에서 그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이 불이 내 앞에서 꺼졌다’라고 알 수 있겠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약 내 앞에서 그 불이 꺼진다면, 저는 ‘이 불이 내 앞에서 꺼졌다’라고 알 수 있습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약에 ‘그대 앞에서 꺼진 그 불은 여기에서 어느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남쪽인가, 북쪽인가?’라고 묻는다면, 왓차여,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고따마 존자여, 그 질문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풀이나 장작 같은 연료를 의지하여 탔던 그 불은 다른 연료가 공급되지 않고 연료가 없어서 꺼져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왓차여, 이와 같이 여래를 형색(色)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여 묘사한다면, 여래에게 그 (개념으로 규정된) 형색(色)은 제거되고, 근절되고, 단절되고, 없어진, 미래에는 발생하지 않는 법(法)이라오. 왓차여, 여래는 형색(色)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다오. 비유하면, 큰 바다가 ‘(사라져서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난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고, ‘가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고,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가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고, ‘가서 태어나지도 않고, 거서 태어나지 않지도 않는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오.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조작하는 행위(行)들, 분별하는 마음(識)도 마찬가지라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전유경(箭喩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漢譯)된 <맛지마 니까야> 63. Cu-l.a-Ma-lun.kya-sutta(말룽꺄에게 설하신 작은 경)에서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독화살과 같은 사견(邪見)이라고 비판하는데, 이 경에서는 이 물음들이 왜 부당한 물음인지 ‘불의 비유’를 통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없던 불이 생겼을 때, ‘이 불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거나, 타던 불이 꺼졌을 때, ‘이 불이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는 것이 부당한 물음이듯이,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으며,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연료에 의지해 타는 불과 같이, 우리 몸은 섭취한 음식에 의지해 36.5℃로 타고 있는 불꽃이고, 우리의 마음은 경험이라는 음식과 의지(意志)와 생각이라는 음식과 분별(分別)이라는 음식에 의지해 타고 있는 불꽃이다. <맛지마 니까야> 9. Samma-dit.t.hi-sutta(正見經)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존자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중생의 상태에) 머물게 하고, 생겨나는 중생들을 (생겨나도록) 돕는 네 가지 음식이 있습니다. 네 가지는 어떤 것들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단식(團食 ; kabal.im.ka-ra a-ha-ra), 둘째는 촉식(觸食 ; phassa a-ha-ra), 셋째는 의사식(意思食 ; manosan~cetana- a-ha-ra), 넷째는 식식(識食 ; vin~n~a-n.a a-ha-ra)입니다. 갈망하는 마음(愛)이 쌓이면(愛集) 음식이 쌓이고(食集), 갈망하는 마음(愛)이 소멸하면(愛滅) 음식이 소멸(食滅)합니다. 거룩한 8정도(正道), 즉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음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食滅道)입니다.
존자들이여, 성인의 제자는 이와 같이 음식(食)을 알고, 음식의 쌓임(食集)를 알고, 음식의 소멸(食滅)을 알고, 음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食滅道)을 알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무의식적인 탐욕(貪睡眠)을 버리고, 무의식적인 분노(瞋睡眠)를 없앤 후에, ‘내가 있다’라고 하는 무의식적인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을 제거한 다음, 무명(無明)을 버리고 명지(明智)를 드러내어,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존자들이여, 이런 점에서 ‘성인의 제자는 정견이 있으며, 견해가 바르기 때문에 가르침(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그 바른 가르침(正法)을 성취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기(緣起)하고 있을 뿐,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자아(自我)가 있어서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이고, 이러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중생이다. 본래 태어나서 늙어 죽는 존재는 없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무아(無我)라고 말한다. 그런데 중생은 네 가지 음식을 취해 자아(自我)라는 망상을 만들어 키우며 살아간다. 그래서 중생은 생사(生死) 윤회(輪廻)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사(生死)는 중생이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이다. 따라서 아상(我想)을 버리면 생사(生死) 윤회(輪廻)는 사라질 뿐, 죽어서 윤회할 자아(自我)도 없고, 죽으면 그만인 자아(自我)도 없다. 우리는 일정한 시간 동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여러 인연에 의해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며 무아설이다.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전남대 호남불교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아함의 중도체계』, 『근본불교』,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등이 있으며,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 『불교와 양자역학』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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