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세상에 들려주는
침묵의 설법
고성 건봉사 만일염불회
이창경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신구도서관재단 이사
출처|고성군청 |
만일(萬日), 그 무한의 정진
생각해보면 아득한 세월이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지만, 그렇게 물처럼 담담하게 흘러간 세월만은 아니었다. 오직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용맹정진하기 30년 가까운 세월.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이었고, 인간적 고통을 남김없이 소멸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의 세월이기도 했다.
날수로 헤아려 만 일, 햇수로 따져도 스물일곱 해. 자신의 반생을 염불에 바친 셈이었다. 발징(發徵) 스님,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 그 만 일이 정지된 의식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스님은 이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만일염불의 서원을 세우고, 그 만 일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원각사(圓覺寺: 건봉사의 옛 이름) 산문 밖을 나가본 일이 없었다. 법당 앞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잎이 돋으면, ‘또 봄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했고, 단풍 든 나뭇잎이 법당 앞에 뒹굴면 가을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하루 열여섯 시간 부처님 앞에 꿇어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일은 깊은 신앙심만으로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신심(信心)의 끝은 어디이고, 그 신심의 끝에는 또 무엇이 남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그 극점에 서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의 그런 뜻을 도반들에게 내비쳤을 때, 하나둘 스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늘었다.
“스님, 소승도 동참하게 해주십시오.”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동참한 스님이 정신(貞信) 스님, 양순(良順) 스님 등 31명이었다. 스님들뿐만이 아니었다. 신도 1,820명이 발심해 스님들의 수발을 들기로 자원했다. 그중 1,700명은 매년 각각 백미 한 말과 맑은 기름 1되를 내어 스님들의 양식을 삼게 했고, 나머지 120명은 매년 포 1필을 내어 스님의 의복을 짓도록 했다. 스님과 신도들이 정성을 다해 출발한 것이었다. 각각 소임을 맡았던 신도가 세상을 뜨면, 그 자손이 이어서 스님의 수발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만일염불회가 이제 회향을 앞두고 있었다. 발징 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는 무아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순간순간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 욕망과 절제, 삶과 죽음, 이 상반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로 귀일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님은 자기 자신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극락이더냐, 해탈이냐, 아니면 세간의 부귀이더냐.’ 마음의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발징 스님의 마음은 무거웠다.
강원도 고성 금강산 건봉사 |
정토(淨土)로 가는 반야선(般若船)
유독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 만일염불회를 회향하는 날, 원각사 스님들은 정좌한 채 아미타불을 염하며 법당에 앉아 밤을 새우고 있었다. 대중들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스님, 저것 좀 보십시오. 광채가 나지 않습니까? ”
서쪽 하늘 새벽 공기를 헤치고 점점 다가오는 무엇이 보였다. 분명 한 척의 배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상은 환히 밝아졌다. 환희로운 음악 소리도 들렸다. 스님들과 신도들의 나무아미타불 염송이 계곡을 뒤덮었다. 오색 광채가 원각사를 감싸고 돌았다.
“아미타불이시다. 우리 정성이 정토에 닿았다.”
어느 누군지 몰라도 소리쳤다. 스님과 대중들은 배가 오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연꽃으로 장엄한 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가운데, 아미타불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희가 이룩한 만일염불의 공덕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이 배 위에 오르도록 하여라. 서방정토가 멀지 않느니라. ”
정신, 양순을 포함한 염불승이 모두 배에 올랐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해동 금강산 원각사에서 이루어낸 염불 공덕이 정토까지 감동시킨 확증의 순간이었다. 공양을 도왔던 신도 913인도 차례로 배에 올랐다.
더 이상 한 사람도 들어설 수 없을 만큼 배 안은 가득 찼다. 배에 오르지 못한 신도들은 미동도 없이 아미타불만을 부르고 있었다. 이때 발징 스님이 앞으로 나섰다.
“한 사람이라도 남겨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모두 함께 갈 수 있도록 제도해주소서.”
“다시 왕생할 복덕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저도 이 배에 탈 수 없습니다. 대신 다른 한 사람을 배에 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악업이 깊어 왕생하지 못한다면 제가 다시 지옥에 가서 고통받을지라도, 모두 왕생케 한 뒤에 가겠습니다.”
스님은 간절히 말했다.
“네가 먼저 가서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무생인(無生因)을 깨친 뒤에 신통한 지혜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다음에야 그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다. ”
발징 스님은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동해의 아침 햇살은 눈부셨다. 정토를 향해 떠나는 반야선(般若船)은 그 햇살 속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실로 며칠 만에 다시 보는 찬란한 햇살이 모든 것을 감춘 채 다시 빛나고 있었다. 부처님, 이 땅에 오신 지 1814년, 신라 원성왕 3년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후일 사람들은 만일염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왕생하던 곳을 등공대(騰空臺)라 이름하고, 여기에 부도를 세워 염불의 공덕을 기리게 했다.
기록으로 정리하다
건봉사 염불정진의 장엄함과 경이로운 응답을 보여주는 기록은 1928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편찬한 『건봉사급말사사적』에도 나타난다. 당시 사찰의 역사 기록은 완벽하지 못할뿐더러 단편적으로 보존된 것도 허황한 것이 많고 수식에 치우쳐 있어 사적 가치를 지닌 것이 많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스님은 ‘사실에 충실해 역사적 가치를 갖게 한다’는 편집 방침을 세웠다.
이 책에는 만일염불회의 기록이 여러 차례 보인다. 758년(신라 경덕왕 17년)에 발징 화상이 처음으로 염불만일회를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염불회의 회향, 2차 염불회(聳虛, 1802), 3차 염불회(碧梧侑聰, 1851), 4차 염불회(萬化寬俊, 1901), 5차 염불회(錦岩宜重, 1928) 등 여러 차례 염불회를 설한 기록을 담고 있다. 1935년에는 31인 소신대에 부도를 설하고 1940년에는 만일회, 보안원, 만석계의 축석을 준성했다.
또 이 책의 ‘건봉사의 비’ 항목에는 1904년 조병필이 편찬한 『대한국간성건봉사만일연회연기(大韓國杆城乾鳳寺萬日蓮會緣起)』 와 『신창만일회사적일기(新創萬日會事蹟日記)』 등의 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건봉사 명소’ 항목에는 소신대(燒身臺)를 소개하고 있다.
이창경|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1989년부터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로 있으면서 신구도서관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예운동』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함께 걷는 책의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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