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지혜와 자비심의 나툼, ‘마하깔라’를 모시고 - 설오 스님 편|슬기로운 수행 생활

깊은 지혜와
자비심의 나툼,
‘마하깔라’를 모시고
설오 스님 편

함영 작가

설오 스님

스승 까루 린포체와 함께
관세음보살의 분노존 ‘마하깔라’와 까루 린포체와의 인연
“라마괸뽀 옐메라 닥니궤뻬 걉수치(스승과 둘이 아닌 마하깔라에게 공경으로 귀의합니다), 닥속셈짼 탐제기 뇬몽마뤼 셀와쏙(제가 일체중생의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게 하소서)” 하고 사구계를 한 후 이 같은 진언을 반복한다.

“옴 벤자 마하깔라 짐지자 비카넨 비나야카 훔훔 펫펫 소하”

진언과 함께 관상으로 모셔온 분은, 남청색 몸에 여섯 개의 팔이 있고 세 개의 눈을 희번덕거리며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두개골로 된 관을 쓰고 50인의 머리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불타오르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치마를 둘렀으며 여러 색의 뱀들을 장신구로 하고 있다. 이분의 이름은 마하깔라!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화현이다. 자비롭고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 아닌, 무서운 괴물의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을 그리며 스님은 매일 몇 번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 같은 수행을 한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11면의 얼굴을 하고 계세요. 제일 위에 있는 첫 번째 얼굴이 아미타불이고, 두 번째 얼굴이 무서운 얼굴을 한 마하깔라죠. 말하자면 마하깔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분노본존이에요. 밀교에는 이러한 분노존들이 계세요.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실은 아주 깊은 자비심과 지혜에서 나투신 모습이죠. 어떤 개념이냐 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해서 사랑의 매를 들기도 하잖아요. 듣기 좋은 말과 사랑만 주는 건 오히려 쉬워요. 악역이 훨씬 어렵죠. 깊은 사랑과 자비가 없으면 힘들거든요. 분노존은 그와 같은 의미가 있어요.”

그러기에 분노존 수행은 티베트 불교의 네 단계 수행(사부와 행부, 요가부, 무상요가부) 중 가장 높은 단계인 무상요가에 속한다.

“어린아이에겐 다칠 수 있으니 칼을 못 주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자라 요리사로서 마스터가 되었을 때는 얼마든지 칼을 써서 좋은 요리를 해낼 수 있죠. 분노존 수행도 그와 같아요. 단계를 밟아 수행하면서 근기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가능한 수행이죠. 그래서 밀교는 근기가 성숙되고 인연 있는 수행자에게 전수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반드시 그 법을 성취하신 스승께서 직접 입으로 전수하고 제자는 귀로 직접 들어야 해요.”

설오 스님은 마하깔라 관정을 대만의 무문관에서 수행할 때 특별한 스승으로부터 처음 받았다. 당시 그 스승은 6세의 어린아이였는데, 티베트 사람들이 마하깔라의 화현으로 믿고 달라이 라마도 그렇게 인정한 까루 린포체였다. 그때의 일들을 스님은 30년이 지나서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학교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체육 선생님마저 “넌 대체 무서운 게 뭐냐?”고 물을 만큼 타고나길 대찬 여장부였고 평생 울어본 적이 없건만, 어린 린포체 앞에선 폭포수처럼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린포체가 방문하신다는 얘기에 사람들과 카닥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는데, 제 뒤로 중풍 걸린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린포체가 차에서 내려 걸어오시더니 그 할아버지 손을 덥석 잡고 가시면서 제 머리를 한 대 툭 치셨죠. 그때 단전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올라오더니 감정이 복받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울면서 린포체를 따라다니다 내가 왜 그런 건지를 물으니 ‘내 제자 아니더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후로 린포체가 계신 인도로 가 7년 반 동안 사원에 머물며 티베트어를 배우고 수행을 했어요. 그때 얼마나 행복하고 좋았는지, 7년 반이 마치 7일처럼 지나간 것 같았죠.”

관정법회 및 수련회

진언과 공양의 가피
출가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은 대만으로 갔다. 중국어를 익혀 한국의 대장경을 원문으로 읽고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대만의 여름은 무척이나 길고 더웠다. 더위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맥콜이라는 보리 음료를 즐겨 마셨는데, 그걸 맘껏 사 먹지 못해 남들이 마시는 걸 보며 부러워하곤 했다. 배가 고파 땅콩 샌드 하나 사 먹고 싶어도 참아야 했고 버스를 탈 차비가 없어 푹푹 찌는 더위 속을 걸어 다니기 일쑤였다. 국수 한 그릇 사 먹는 것이 당시 끼니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토록 가난한 유학 생활을 10년 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대만 사람들의 남다른 신심 때문이었다.

“국수를 사 먹고 앉아 있으면 손님들 중 누군가 나가면서 저기 계신 스님의 음식값이 얼마냐며 대신 내주곤 했어요. 뜨거운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으면 사람들이 합장하며 인사하곤 하는데, 어떤 사람은 땀을 닦으라고 휴지를 건네주기도 하죠. 그러면 그 휴지 속에 보시금이 들어 있곤 했어요. 그런 분들 덕분에 무사히 석사까지 마칠 수 있었죠.”

대만에서 처음 만난 스승은 남회근 노사님이었다. 유교와 도교는 물론 선종, 밀교까지 두루 섭렵해 중국의 가장 훌륭한 유마거사로 불릴 만큼 존경받는 분이었는데, 학생들에게 매일 일기를 쓰게 했다. “메꽌씨(괜찮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일기를 써야 하니 죽을 노릇이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와 같은 단순한 문장을 간신히 배워 일기랍시고 써서 제출하니, 노사님이 일기장을 집어던지며 “너 밥통이냐! 한국에서 중학교나 나왔냐! 대학교에 와서 민폐 끼치지 말고 한국으로 가라”며 소리쳤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때부터 매일 경전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준제진언이 영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매일 만 번씩 준제진언을 했죠. 그렇게 50만 번을 하는데 대장경이 갑자기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보이더라고요. 그 후로 경전을 보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진언이 그토록 영험한 줄 그때 처음 알았죠.”

진언의 영험함을 또다시 실감하게 된 건 공동묘지를 깎아 만든 희양양의 빌라촌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 빌라촌에는 책만 잔뜩 쌓아놓은 불교 단체 소유의 빈집이 있었는데, 당시 석사 논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대장경이 필요했고 여전히 가난했기에 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불교 단체를 찾아가 논문을 쓸 동안 그 집에서 지낼 수 없겠냐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그 터가 원래 공동묘지였기 때문에 못 사실 거라며, 다른 스님들도 귀신들이 나와 못 살고 다 가셨다는 거예요. 그래도 당시 내 상황이 너무 절박했고 설마 무슨 귀신이 있으랴 싶어 무조건 들어갔어요. 그런데 정말 자정만 되면 찬 기운이 뻗치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자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졌죠. 그러면 귀신들이 죽을 당시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던지 어쩔 줄 모르다 지장기도를 막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천도재를 했어요. 워낙 가난하다 보니 내가 먹는 우유니 과자 몇 개 올려놓고 천도재를 준비하면, 귀신들이 내 의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마구 끌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가 아무리 귀신이지만 이런 더러운 데선 못 먹는다고 하길래,(웃음) 내일 아침 일어나 물청소를 다 할 테니 자게 좀 해달라고 싹싹 빌었죠. 내가 자야 내일 천도재를 할 거 아니냐고 사정해도 소용없어 ‘옴남’을 소리내기 시작했어요. 『천수경』에서 공양 올리기 전에 하는 ‘정법계진언’이 갑자기 생각나 ‘옴남’을 네 번째로 소리내어 하는데 그제야 날 내려놓고 사라지더라고요. 그 후로 귀신들을 엄청 많이 천도하면서 그곳에서 결국 석사 논문을 마쳐 학위를 받을 수 있었어요.”

지장보살의 인연은 스님이 한국으로 돌아와 법등사라는 절을 창건할 때도 이어졌다. 법등사는 절이 들어서기 거의 불가능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른바 ‘하느님의 마을’로 불리는 천주교 성지인데,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머리를 신자들이 몰래 가지고 숨어들었던 동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주민들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인데다 백 년 된 교회까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곳에 법등사를 짓게 된 것은 지장보살의 선몽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요한이고 요셉이고 권사고 집사예요. 그런 동네에 스님이 이사를 오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굉장히 어려워하고 어떻게 내보낼지 고민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도 딱히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미 꿈에서 그러한 장면을 봤고,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도 짐작하고 있었죠. 동네 사람들 중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무조건 조의금을 챙겨 장례식장을 달려갔고, 마을에 무슨 일만 있으면 떡을 해서 돌리곤 했어요. 원래 주는 놈한테는 당할 자가 없다고,(웃음) 그렇게 공양을 많이 올린 덕에 편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죠.”

승가대 학인 스님들과

수행에 앞선 수행, 참회 기도
설오 스님이 30대에 만난 6세의 스승, 까루 린포체는 이제 30대의 청년이 되었다. 그분을 스승으로 모신 지 30년이 흐른 것이다. 지장보살의 선몽과 가피로 세워진 법등사는 지장보살 도량인 동시에 그러한 스승의 법을 전하는 한국의 첫 센터이다. 평소엔 ‘지계공덕회’라는 모임을 통해 수행의 근기를 키워가고, 매년 한두 번은 까루 린포체를 비롯한 자격을 갖춘 스승들을 모셔 밀교를 제대로 배우고 수행할 수 있는 수련회를 마련하고 있다.

수련회 때는 관정과 법회를 통해 특정 주제를 갖고 함께 공부하지만, 그 외엔 밀교의 전통과 특성상 각자 수행하면서 필요할 때면 스승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현교든 밀교든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공통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수행이 있다.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수행이 가장 기본이고 중요하죠. 제대로 수행하려면 일단 그릇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릇이 깨끗해야 법의 감로를 담았을 때 그것을 마실 수 있는 차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걸 담아도 탁해지거나 못 먹게 되죠. 그래서 그릇부터 깨끗이 씻어 정화한 후 수행해야 효과가 나타날 수 있어요. 일단 마음이 안정되고, 지혜가 열려요. 무얼 해도 행동이 가볍고 편안하면서 사람들한테 기쁨을 주고 신뢰를 주게 되죠. 하고자 하는 일도 저절로 되어가듯 풀려가고 기적 같은 일들이 현상적으로 일어나죠.”

그러한 정화의 수행으로써 밀교에선 금강살타 기도를 주로 하고 현교에선 지장기도를 한다.

“법등사처럼 지장보살을 모시는 도량에는 『지장삼부경』이 있어요. 그래서 지장재일에 지장경 독송을 하고 『점찰선악업보경』이라고 지장보살이 설한 경전을 통해 자신의 주된 업과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참회하는 기도를 해요. 제 경우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잘 쓰러졌고, 서른 살을 넘기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할 만큼 단명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제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 나쁘다는 소릴 많이 했죠. 말투가 군인 같고 명령조였거든요. 그런데 출가 후 『점찰선악업보경』을 보니 전생에 군인 노릇으로 인한 살생의 업이 중하다고 나오더라고요. 누군가는 제가 전생에 독일군이었다는 얘길 한 적도 있었죠. 그래서 그 업을 참회하는 기도를 많이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일 년 내내 달고 살던 감기조차 걸리지 않더라고요. 평소에 주지로서 할 일도 하고, 승가대학 강의도 나가고, 일 년에 몇 번씩 해외에도 다녀오고, 또 천 평이 넘는 밭농사도 짓고 있어서 하는 일이 정말 많은데, 그 많은 일들을 거뜬히 할 만큼 건강해졌죠.”

법등사 전경

업장을 참회하는 기도를 하면서 달라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말투가 군대식인 것도 모자라 기름처럼 느끼하다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식용유’라고 부르곤 했었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승가대학 강의를 나가면 학인 스님들이 제게 ‘신심 존자’라고 해요. 제 강의를 들어야 신심이 나서 일주일이 충전된다면서요. 일명 ‘식용유’에서 ‘신심 존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신인가요.”(웃음)


함영|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노란 문 공양간이 열리면』, 『스승들이 납시어 어른스크림을 사드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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