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행복 ; 마음의 지혜와 과학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행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알려져왔다.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참된 행복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펴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이번 호부터 연재하는 <행복 : 마음의 지혜와 과학>은 행복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고 그중 보편적 의미를 갖는 철학적 고찰을 정리해 행복이 무엇이고 과연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잘 사는 것에 관한 불교적 입장, 구체적으로 명상적 입장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본다

많은 분들이 행복을 찾고 있다. 다른 많은 분들은 행복을 걱정하고 있다. 행복은 우리의 인생을 즐겁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인데 또 많은 분들은 그냥 행복을 넘어서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행복은 무엇이고 또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인간의 권리인가? 행복은 인간의 의무인가? 행복한 삶은 인간이 누릴 최고의 삶인가? 행복한 삶은 올바른 삶인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 글은 행복에 관한 글이다. 행복하려는 분들, 행복에 관심이 있는 분들, 행복을 차근차근 밟아가려는 분들을 위한 글이다.

행복이라는 말처럼 가슴 설레는 말도 없다. 행복이라는 말처럼 혼란스러운 말도 없다. 그래도 행복이라는 말처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생각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지만 이렇게 질문하고 생각하면 행복이 곧 사라질 것 같아 조심스레 생각하면서 질문하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잡아도 사라지고 잊고 있어도 그냥 나타나기도 하는 이상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가까이 가면 사라지기도 하는 무지개다. 패러독스가 가득 찬 파라다이스다. 이 글은 행복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은 이 패러독스를 이해하면서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글이다. 행복을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그리고 새롭게 조명하고 그 있던 길을 새 길처럼 알아가려고 하는 글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행복이 지나갈 때 적어도 알아볼 수는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 조심스레 모은 글이 이 글이다.

행복에 관해서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루에 세 번 이상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하면 행복해질까? 남에게 행복을 주면 나의 행복은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참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런 질문들에 답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인생이나 삶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많은 분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어렵기도 하지만 잘 살펴보면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이미 인생이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인생이 무의미할 가능성은 이미 닫아놓고 시작하는 질문이다. 무엇인가를 예단하고 던지는 질문은 선결 문제의 오류를 저지른다. 인생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인생에는 의미가 있을 수 있냐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 논리적으로 올바르다. 행복에 관해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등등의 질문을 하려면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그 뜻을 풀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개념적 분석이 중요하다. 행복이라는 말이 그저 공허한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뜻을 잘 살펴야 한다. 그 조건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행복의 다양한 의미와 관점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행복으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삶의 문제를 개념 분석만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다. 무엇인가 구체적인 결단을 내리고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개념이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가보고 확인하고 최선의 길을 선택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자료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자는 행복의 개념 분석과 더불어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생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행복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이해가 상당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혜가 많은 성현들과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철학자들과 관찰력이 꼼꼼한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놀라운 것이 많다. 그래서 이들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은 각각의 인생이다. 하지만 이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하다. 이것이 행복의 길에 길도우미가 필요한 까닭이다.

행복의 병
행복의 길을 찾다 보면 놀랍게도 행복에 반대하는 분들을 볼 수 있다. 행복을 반대하거나 버리라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행복은 잘못된 길이라 생각한다. 행복은 병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행복은 또한 인간을 비열하거나 저급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은 올바로 사는 것이지 행복이 아니라고 이분들은 소리친다. 이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그 가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과 한계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맹목적인 행복의 추종은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병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인생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애플루엔자를 살펴보자. 애플루엔자(affluenza, 애플루엔자[부유함의 독감균, 부자병, 소비중독병], affluence 부유함과 influenza 독감균의 합성어,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대중매체와 심리학계에서 자주 논의된 사회적 병리 현상)는 맹목적인 욕망의 추구가 정신적 파멸을 일으키는 마음의 전염병이다. 최근 미국 텍사스의 10대 소년 에단 카우치(Ethan Couch)는 무책임한 태도와 음주 운전으로 네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두 명을 심하게 다치게 했다. 하지만 카우치의 행동에는 전혀 뉘우침이나 당황함이 없었다. 카우치의 행동을 조사한 심리학자는 이 소년의 행동을 애플루엔자라고 진단했다. 이 소년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면서 특권 의식과 맹목적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현실 감각이 무뎌지고 스스로 행위의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약물과 음주를 일삼고 방탕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삶이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자본주의와(잘못 이해된) 복지 이념이 애플루엔자가 자라는 배양장이 되었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현실 문제들은 무시하고 그저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만연된 것이 애플루엔자균이 나타난 원인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사악한 경제 체계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구조 아래에서 경제적 효용성과 욕구 충족의 최대화라는 목표를 강조하다 보니 행복은 대략 물질적인 편안함과 사회적 안락함으로 동일시되어 맹목적인 물질적 풍요함의 추구가 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행복이 물질적 풍요로 손쉽게 이해되고 이것이 곧 자기만족이나 무책임한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애플루엔자의 요점이다. 소유가 존재를 위해 있어야 하는데 존재가 소유에 종속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다 보면 행복의 추구가 병적인 집착이나 무감각적 쾌락주의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종종 발견되는 한탕주의나 대박주의 역시 애플루엔자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다.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려면 한탕이 아니라 공생(共生), 대박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행복을 보려면 행복의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몸체가 길면 그림자 또한 긴 것이다. 이 글에는 행복의 그림자에 관한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청바지의 역설
이렇게 행복의 빛과 그림자를 보면 행복에 관한 입체적인 이해가 생긴다. 행복의 빛과 그림자를 보게 되면 이제는 행복의 위와 아래를 보아야 한다. 행복하려는 마음은 행복인가 불행인가? 행복의 기대감은 행복만큼이나 마음을 흥분시킨다. 그러나 기대감이 크면 기대한 것이 나타났을 때 실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향들, 즉 매몰 비용에 관한 포기 지연 효과(sunk cost effect, 시간, 노력, 그리고 자원을 투자한 일이 분명히 나쁜 결과를 보여주는 데도 쉽사리 계획을 취소하지 않는 성향)나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 손안에 있는 물건들의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성향) 같은 것들은 개인적인 관심, 노력 그리고 기대가 가치의 평가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기대가 많고 생각이 많으면 그만큼 실질적인 행복의 가치가 감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마치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의 결과에 쉽게 실망하게 되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르츠[Barry Schwartz]가 주장한 선택의 양과 만족의 양의 반비례 현상)과 같은 것이 행복의 기대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슈워르츠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과거에 청바지를 사려고 옷가게에 가면 청바지는 한 종류에 그 크기는 대략 대중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청바지 종류가 너무도 많다. 청바지 종류는 허리가 드러나는 정도, 바지의 폭, 끝단의 모양 등등에 따라(예를 들어 low rise, mid rise, high rise, normal, relaxed cut, straight cut, skinny, slim, boot cut, baggy fit, drop crotch) 인간 하체를 해부학적으로 자세히 구분한 것과 같이 다양해졌다. 이런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자신에게 맞는 청바지를 찾다 보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 우리는 만족의 기대치를 올리면서 동시에 지치고 만다. 그래서 정작 청바지를 사서 입고 다닐 때가 되면 상대적으로 만족감은 그리 높지 않은 상태가 된다. 선택의 증가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원래 의도와 달리) 만족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 역설의 요점이다. 행복에 대한 과도한 구체적 관심이 이와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행복의 기대가 집착이 되면 행복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저 행복을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오히려 연약한 듯한 것이 변화에 잘 견디고 오래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행복에 집착하면 행복에서 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행복하고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장자(莊子)는 지락무락(至樂無樂), 즉 최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까지 한다.

그렇다고 행복을 무시하는 것도 좋지 않다. 행복의 집착을 경계해야 하지만 행복에 대해 건전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에 대한 생각은 잘 살아보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복에 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인생을 그냥 그렇게 살겠다는 생각이니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행복에 적당한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관심이 중요한가? 행복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행복에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까? 또 행복하려는 마음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행복에 도움이 되는가? 이렇게 해서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이것을 행복에 관한 메타분석(meta analysis – 행복 그 자체뿐만 아니라 행복에 대한 행복 또는 행복에 대한 행복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행복과 행복에 대한 관심은 개념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이 둘이 사실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관심이 행복 자체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가 하는 것과 행복에 대한 관심이 행복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혹은 행복에 대한 관심의 관심의 관심의 관심이) 행복에 중요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이러한 메타분석의 핵심이다. 이렇게 행복에 관해 다차원적으로 논의하게 되면 행복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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