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불교에서 보는 욕망 |불교와 욕망

유식 불교에서 보는 욕망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욕망은 개체로서 나의 생명 유지와 자기만족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충족시켜야 할 것
『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음식남녀(飮食男女)’이고 싫어하는 것은 ‘사망빈고(死亡貧苦)’라는 말이 있다. 가난과 죽음을 싫어하고 식과 색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 ‘식색지욕’을 잘 표현한 말이다. 욕망은 자신의 한 몸을 잘 지키고 보존해 그로부터 쾌적한 심리 상태를 느끼고자 하는 바람이다. 흔히 식욕을 자기 보존 욕구, 성욕을 종족 보존 욕구라고 말하지만, 성욕 또한 그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기에 결국 개별 생명체로서의 나의 삶을 만족스럽게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욕망은 개체로서의 나의 생명 유지와 자기만족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도 하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내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채워야 하고, 심리적 만족을 위해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이며, 이때 욕망은 곧 개체적 자아인 나를 위한 욕망이다.

부처님께서는 왜 ‘5온으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무아를 설하신 것일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나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나를 탄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기동일적 자아로 존재하는 항상되고 단일한 나, 즉 상일(常一)한 나라고 여기고, 또 나니까 내 맘대로 되는 주재(主宰)적 나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일주재적 나라는 개념을 갖고 그런 나를 바로 나의 심신, 즉 5온(蘊)으로 여기지만, 5온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항상되지 않아 무상하고 주재적이지 않아 괴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상과 고로부터 내리는 결론이 바로 무아이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괴롭고, 괴로우므로 비아이다. (…)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이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괴롭고, 괴로우므로 비아이다.(『잡아함경』)


부처님께서는 5온이 항상되지 않아 무상하고 주재적이지 않아 고라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5온은 자아가 아니라는 ‘비아’ 그리고 5온에 자아는 없다는 ‘무아’를 설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5온이고, 그 5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상일주재적 자아’ 개념을 고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일주재적 자아 개념을 버리고 무상과 고의 자아 개념을 수용하면서, 그렇게 ‘무상하고 괴로운 5온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유아(有我)’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즉 ‘자아가 없다’는 무아가 아니라 ‘5온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유아가 맞는 말이 아닐까?

어찌 보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동일적 자아,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바뀌고, 당연히 나도 바뀐다, 모든 것은 물리적 인과법칙을 따라 규정되니, 나의 심신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이며, 그렇게 ‘무상하고 비주재적인 나, 5온으로서의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무아가 아닌 유아의 주장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관점에 있기에, 불교의 무아가 이해되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5온으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무아를 설하신 것일까? 우리가 나를 5온으로 알고, 그런 5온으로서의 나, 무상하고 괴로운 나가 있는데, 왜 굳이 무아를 설하셨을까? 그 답은 부처님의 설법 중에 나온다.


색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라. 이렇게 관하면 바른 관찰(정관)이다. 정관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염리심)이 생기고, 염리심이 생기면 즐겨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을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잡아함경』)


부처님께서 무상과 고의 5온이 있음에도 무아를 설하신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무상과 고의 5온에 머무르지 말고 5온의 무상과 고를 깨달아 그런 5온을 떠나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5온의 무상과 고를 깨달아 5온에 대한 염리심(厭離心)을 내고 5온에 집착하는 희탐심(喜貪心)을 멸해 해탈하라는 것이다. 5온을 좋아하고 아끼며 집착하는 희탐심이 곧 5온으로서의 나를 살게 하는 나의 욕망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개체적 자아인 5온에 집착하는 욕망을 넘어 마음의 해탈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나의 삶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욕망을 따르지 않으면, 나보고 이 세상을 과연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가? 욕망 없이 이 세상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개체로서의 나의 생명 유지와 자기만족을 포기하라는 것인가? 5온이 무상하고 괴롭기에, 우리도 이미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오히려 더 악착스럽게 그 5온의 생명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만족을 느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대승불교, 그중에서도 특히 유식 불교가 깊이 고민한 것이 바로 이 문제가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5온의 실상을 바르게 관해 5온을 떠나고 5온에 대한 희탐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저 5온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5온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5온의 깊이를, 결국 5온 너머를 바라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5온으로서 살아가는 우리 중생이 사실은 중생 이상이라는 것, 중생 안에 온 우주를 만들어내는 무진장의 힘이 막대한 보물창고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 중생은 각자 자신만의 5온의 울타리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를 그 안에 품는 무한과 절대의 마음이라는 것, 그 점에서 중생이 곧 부처이며, 그렇게 우리는 부처로서 모두가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를 만들어내는 무한한 힘을 지닌 식(識),
진공묘유의 마음, 제8 아뢰야식
유식은 5온을 나로 알고 집착하는 자아식 내지 의지를 제7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르고, 그 제7 말나식 안에 우리의 근본 번뇌인 탐진치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욕망의 자리는 바로 아상과 아집에 물든 제7 말나식인 것이다. 그런데 유식이 이 제7 말나식의 욕망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 욕망을 떠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그보다 더 심층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심층 마음인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유식은 우리가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는 나와 세계, 즉 유근신과 기세간이 모두 아뢰야식 내 종자(업력)가 현행화해 만들어진 가(假)라고 말한다. 그렇게 제8 아뢰야식은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를 만들어내는 무한한 힘을 지닌 식(識), 진공묘유의 마음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이 일체중생은 우주 창조자인 범천(브라만)에 의해 만들어진 개체(아트만)가 아니라는 것, 중생은 오히려 중생 자신의 업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正報)이고, 세계는 그들 중생이 거기 의거해 사는 의보(依報)라는 것, 그렇게 일체는 업의 결과인 보(報)라는 것이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유식의 수행자들이 깨달은 것은 중생의 업이 남긴 업력(종자)이 중생 자신의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다가 인연 따라 5온(유근신)과 세계(기세간)로 변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5온을 포함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무한히 큰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
현상의 5온을 나라고 여기는 말나식의 집착과 욕망 넘어서야만
심층의 일심 자각할 수 있어
결국 우리는 현상적 자아인 5온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그 5온을 포함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무한히 큰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인 것이다. 우리는 현상적으로는 모두 서로 다른 차별상의 5온으로 존재하지만, 그 심층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인 일심으로 존재한다. 현상의 5온을 나라고 여기는 말나식의 집착과 욕망을 넘어서야만 이 심층의 일심을 자각할 수 있기에, 유식은 우리에게 말나식의 집착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탐진치의 번뇌, 5온에 매인 욕망을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결국 부처님이 5온을 떠나라고, 탐진치를 멸해 해탈하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 안에서 5온과는 다른, 더 깊은 차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드러난 차별적 모습인 상(相)에 매이지 말고, 그 상 너머 하나의 성(性)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그 부처의 성품, 깨달음의 성품, 불성(佛性)을 자기 마음으로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자타를 가르는 분별심에 머무르지 말고, 자타분별 너머의 하나 됨을 자각하며, 분별적 욕망 너머에 있는 자신의 본심, 여래심, 진여심, 일심, 본래면목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인 일심의 깨달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일심의 지평 위에서만 우리는 자타분별에 따른 욕망 대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욕계가 서로 간의 끝없는 욕망의 각축장이 아닌 사랑과 용서와 나눔의 터전이 되어, 조금은 덜 고통스럽고 그래서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세계가 될 수 있기에, 그 각자의 마음속의 일심을 일깨우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고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탐진치의 번뇌와 욕망을 넘어서라고 말하고, 유식은 말나식의 집착을 넘어 자신 안의 심층 마음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일심의 자각에서 우러나는 자비의 마음에 의거해서만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적절한 선을 긋고 타인의 욕망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리이타와 이고득락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자경|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계명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의 무아론』, 『대승기신론 강해』,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공적영지』,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일체유심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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