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와
결혼과 출산의 의미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일체가 모두 괴로움이라면 결혼 출산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적 선택이나 의지적 결단이 아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져 있고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는 본능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철이 들면서 우리는 왜 사는가를 묻지만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침에 버스를 타는 것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이고, 학교에 가는 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이다. 식당에 가는 것은 밥을 먹기 위해서이고, 회사에 가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낱낱의 행동에는 그것을 왜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반면 그런 일련의 행동들 전체를 하나로 묶어 ‘삶’이라고 칭하면서, 그 삶을 왜 사는지,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그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그 행위의 끝이나 그 너머에 있다면, 삶의 목적이 삶의 끝인 죽음에 있게 되니, 결국 ‘왜 사는가?’의 물음은 ‘죽기 위해 산다’가 답이 되는 어불성설이 성립하게 된다. 게다가 불교가 말하듯이 일체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맞다면, 도대체 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 괴로운 삶 중에서 인륜지대사라고 불리는 결혼, 그리고 다시 또 하나의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할 자식을 만들어내는 출산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결혼과 출산은 ‘번뇌 즉 보리’를 실감하게 하는 기회 될 수 있어
전통적으로 결혼은 여자와 남자 두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두 집안이 함께 얽히는 문제였으며, 그것도 가부장제적 남녀 역할 분담에 따라 한쪽으로 꽤 많이 기운 불공정한 결합이었다. 오늘날은 남녀평등의 면에서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결혼제도에 묶이는 구속보다는 비혼을 선택한다. 또 사랑의 상대를 독점하는 결혼은 한다고 해도 고해(苦海) 속에 던져질 또 하나의 인생을 이끌어오기보다는 피임을 선택한다. 굳이 자식을 만들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될 자신들의 부양을 위해 또는 국가 경제를 담당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인격을 수단화하는 것이니, 그것을 출산의 이유로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긴 세월 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결혼과 출산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자연적 본능과 욕망의 표현일 뿐일까? 혹 그 본능과 욕망 안에 인간이 쉽게 감지하지 못해도, 생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만드는 모종의 깊은 뜻이 이성(理性)의 간계로 숨겨져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게 결혼과 출산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젊은 시절 인간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 같고, 삶의 의미와 목적은 불투명하게 느껴지던 시절,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 공부 이외의 다른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서고 싶은 때가 있었다. 결혼은 반쪽의 둘이 만나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며 결혼을 권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은 오히려 온전한 하나의 인격을 안사람 또는 바깥사람으로 스스로 반쪽화하고 불구화해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큰소리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삶의 의미는 철학적 사유나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성의 사용 전에 이성이라는 인식 도구를 먼저 비판해야 한다는 칸트의 비판철학을 헤겔이 비판하면서 했던 말, 수영은 수영의 원리를 물 밖에서 이론적으로 알고 나서 그다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물속에 들어가 수영하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말이 타당하게 느껴지면서, 그 이치를 삶에까지 적용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삶, 내가 있기까지 이어져온 그 삶의 방식을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나는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을 낳게 되었다.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애 둘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애들은 갓난아이일 때 돌보는 것도 힘들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이리저리 충돌하는 것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다. 말 안 듣고 대드는 것은 기본이고, 몇 시간씩 하는 게임 말리기도 힘들고, 연년생 둘이 서로 싸우는 거 야단치다 결국 부부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것도 힘들어, 매일의 일상이 마치 전쟁과도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생각한 것은 애들 키우면서 복닥대는 일상이 바로 수행처라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내 생각을 접고 양보하면서 내 삶의 중심에 나 아닌 아이들을 놓는 것을 연습해야 했다. 때론 속상해도 수용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 때론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당장 말로 따질 필요 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야 했다. 인내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다 보니, 그래서 부모가 되면 부모가 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애가 부모를 사람 되게 가르치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스님 한 분을 학회에서 뵙고는 다짜고짜 여쭈었다. “스님, 애를 낳아 기르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고 엄청난 수행의 길이라고 여겨지는데, 진짜 수행하고 싶으면 혼자 훌훌 털고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해 애를 낳고 키워보는 것이 더 빠른 길이 아닐까요?” 사실은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의 생활을 부러워하면서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스님이 대답하셨다. “스님들의 세계에는 ‘상좌 하나에 지옥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 ‘인간 사는 곳은 어디나 다 수행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에게는 상좌가 자식에 해당할 것이다. 육체적 핏줄이든 정신적 핏줄이든 타인과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다는 것은 그와의 관계에 그만큼 많은 것을 건다는 뜻일 것이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 끝없는 집착이 되고 애끓는 번뇌가 되어 결국 불타는 지옥으로 추락할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관심을 나의 마음을 비우고 상대를 위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자비의 마음으로 승화시켜 보살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폭이 큰 만큼 마음의 흔들림도 클 것이니, 그것이 곧 수행의 강도를 강화시키는 시험장이 되며, 이 점에서 결혼과 출산은 ‘번뇌 즉 보리’를 실감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은 부족한 범부가 그 부처의 마음을 알아가는 수행의 길이 아닐까
불교에서 수행은 탐진치의 소멸을 목표로 한다. 수행자는 무명의 치심 위에서 일어나는 탐심과 진심을 약화시키고 소멸시키고자 한다. 물론 결혼과 출산은 엄청난 탐심의 산물이다. 배우자에 대한 애탐의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그 애탐의 마음의 결정체로 자식이 탄생하며, 그로부터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본능적 애착이 생겨난다. 문제는 탐심은 끝없이 제한 없이 뻗어나간다는 것이다. 무제한의 탐심은 서로 부딪쳐 충돌하게 되며, 그렇게 해서 수용되지 않고 거부된 탐심은 곧 진심으로 바뀐다. 탐심과 진심,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탐심의 이면이 곧 진심이고, 사랑의 이면이 바로 증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집 사람보다 배우자와 더 잘 싸우고, 옆집 아이보다는 우리 집 아이와 더 많이 부딪친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다투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면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지나친 탐심 또는 끝없는 진심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면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의 실천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아보고자 결혼하고 딸, 아들 낳아 키우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삶의 의미는 삶 바깥이 아니라 삶을 사는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삶을 통해 자신을 좀 더 나은 인격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수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장 가성비 좋고 만족도 높은 수행의 길이 바로 결혼과 출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배우자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수행이기에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괴로워도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될 때 부러움이나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더불어 기뻐하는 수희(隨喜)가 어떤 것인지도 자식을 통해 알게 되고, 타인이 잘못할 때 시시비비의 분별심이나 분노심 없이 그저 안타깝고 마음 아파하는 비인(悲忍)이 어떤 것인지도 자식을 통해 알게 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 마음인지를 알게 되며, 일체중생이 모두 법신의 화신이며 관세음보살의 현현이라고 믿게 된다.
자식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나를 내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남을 위해 나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반쪽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반쪽이 아니라 반의 반쪽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쉽게 나를 내어줄 수 있겠는가? 타인을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생명은 수억만 금을 다 줘도, 온 우주를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무진장의 가치임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식이다. 그러니 자식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비우는 수행의 삶을 살게 만드는 존재이고, 그 수행을 통해 우리의 삶은 더욱 충실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하의 일체중생을 모두 내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 아닐까. 결혼과 출산은 부족한 범부가 그 부처의 마음을 알아가는 하나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자경|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계명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의 무아론』, 『대승기신론 강해』,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공적영지』,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일체유심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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