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업 소멸을 위한 불교 심리 치료와 묵언 수행|불교와 거짓말, 구업(口業)

구업 소멸을 위한
불교 심리 치료와 묵언 수행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교수


정어(正語)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 수행은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된다. 나머지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팔정도를 제외한 「삼십칠조도품」에는 정어, 정업, 정명이 없다. 어업명(語業命)으로 인해서 팔정도 수행은 나머지 어떤 수행법보다 포괄적이게 된다.

어업명은 인간의 모든 유위법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어(語)는 당연히 말로 짓는 업을 말하고, 업(業)은 행동으로 짓는 업을 말하고, 명(命)은 사회적 관계에서 짓는 업을 말한다. 팔정도 수행에서는 인간의 모든 측면이 수행과 연관된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 올바른 사유 패턴, 언어 패턴, 행동 패턴, 관계 패턴을 가지는 것이 모두 불교의 궁극 목표를 성취하는 것과 연관이 된다.

정어(正語)는 잘못된 언어 패턴으로 양설, 악구, 기어, 망어 네 가지를 제시하고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올바른 언어 패턴으로 제시되고 있다. 화합을 이루게 하는 말,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 유익한 말, 정직한 말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잘못된 언어 패턴의 반대인 올바른 언어 패턴이 정어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언어는 언어가 자체적으로 가지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불교에서 실재는 매 순간 생멸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는 모든 것을 고정시키기 때문에 생멸하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명명할 수 없다. 단지 유사하게 이름 붙일 뿐이다. 이는 언어는 달 자체는 될 수 없고, 달을 가리키는 역할, 즉 지월(指月)의 기능을 할 뿐이다. 그리고 불교에서의 언어는 이처럼 실재를 지향하는 언어이면서, 불교의 궁극 목표를 지향하는 언어이다. 궁극 목표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화합을 이루게 하는 언어, 친절하고 부드러운 언어, 유익한 언어가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를 지향하는 언어이기에 단지 정직어, 진실어를 지향하고 추구할 뿐이지, 정직어 진실어 자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언어의 이러한 특징을 알았기에 선불교에서는 직지인심, 불립문자라고 해서, 마음이라는 실재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 언어나 문자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개구즉착(開口卽錯), 즉 말을 하면 바로 그르치게 된다. 이러한 문구는 모두 언어의 고정성과 실재의 생멸성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어(正語)는 올바른 언어 패턴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가 가지는 본래 특징을 정확하게 알고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언어 패턴을 사용할지라도 언어가 가지는 고정성에 취착되어서 올바른 언어 패턴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정어가 아니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는 올바른 언어 패턴은 아닐지라도 제자의 수행을 위해 스승이 욕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정어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목표 지향적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때 스승의 욕은 정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실재와 언어적 표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언어의 본래 특징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정어의 출발점이 되고, 실재 지향적 언어, 목표 지향적 언어를 구사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은 정어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집착 없는 올바른 언어 패턴을 사용하는 것은 정어의 실재가 된다.

두 가지 묵언
사유는 언어적 경향성으로도 불린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는 언어의 형태로 생각을 한다.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언어가 발현되는 것이 사유이다. 묵언(默言)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묵언은 언어적 경향성까지 쉬는 것이다. 아무리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수많은 말을 하고 있다면 이는 묵언 수행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묵언 수행의 궁극에는 언어가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언어는 고정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러한 고정성은 언어에 의해서 고정된 것과 그 이외의 것을 구분하는 것을 토대로 한다. 이처럼 언어는 분별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속적으로 봄으로 인해서 이러한 분별성을 보게 된다. 분별성은 실재의 본래적 특징인 생멸성과 반대되는 것이다. 분별을 하는 한에는 생멸이라는 실재를 보지 못하게 된다.

언어를 쉬고, 사유를 쉬는 것은 이러한 분별성으로부터 벗어나 비분별적인 실재를 보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제안된 것이 묵언 수행이다. 이처럼 묵언은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적 경향성인 사유의 분별성을 쉬는 것이 된다. 묵언 수행을 통해서 궁극 목표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인 분별성을 쉬게 하는 것이 묵언 수행의 첫 번째 본질이라고 한다면, 묵언 수행의 두 번째 본질은 말 자체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언어와 사고가 희론으로 나아가지 않게 한다. 말을 함으로 인해서 말 자체가 말을 만들어내는 순환적 증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증장 구조로 인해서 언어는 희론이 된다. 탐진치가 소멸하는 방향성이 아니라 탐진치가 증장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할 때 침묵 자체는 증장적 구조를 끊는 역할을 한다. 부처님께서도 외도와의 논쟁에서 부처님의 말씀 자체로 인해서 외도가 희론을 증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는 침묵하셨다. 개인적으로도 학생들이 말 자체에 매달려서 말에 집착하는 경우에도 말을 그만하고 내가 원래 하고자 하는 의도에 초점을 맞추라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묵언 수행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언어의 분별성, 고정성, 희론성을 안 상태에서는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언제든지 실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묵언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의 소통이다. 실재와의 소통을 지향하는 것이 된다. 묵언(默言)에서 언(言)을 목적어로 사용해 언을 침묵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묵(默)이든, 언(言)이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묵언 수행이 될 것이다.

인간인 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개발한 가장 뛰어난 의사소통 수단이 언어이고, 이 언어로 인해서 인류는 문명을 만들었다. 얻은 것이 있는 만큼 잃은 것은 실재와의 소통이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을 이해한 상태에서 언어를 사용하면, 언어가 실재 자체는 아니지만, 실재를 가리키고 지향하는 수단으로서 유용한 소통 수단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언어는 더 이상 실재의 반대로서 언어가 아니라, 실재와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 언어의 본래 특징을 알고 나면, 묵언 수행에서 묵과 언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언어가 실재를 분별화시키고, 고정화시키고, 희론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에는 묵을 통해서 언어의 본질을 통찰하고, 언어가 실재를 지향하고,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에는 언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실재를 보게 하면 된다.

묵언은 언어를 단순히 질병으로 취급하고, 수행의 방해 요소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묵언의 궁극은 묵과 언, 침묵과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단, 실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를 지속적으로 발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언어는 언제든지 고정화하고, 희론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언제든 이러한 가능성이 보일 때는 언어를 끊고 실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마음이다. 말이 아니라 마음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심리 치료는 마음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심리 치료의 주제가 마음이고 마음은 실재이므로, 언어의 고정성, 희론성을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주제인 마음을 놓치게 된다.

이와 같은 언어의 사용은 심리 치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담을 통한 심리 치료에서 언어에 대한 가장 큰 구분은 언어의 지시적 사용과 비지시적 사용일 것이다. 로저스는 기존의 언어 사용을 지시적 사용으로 분류하고 자신은 비지시적 상담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무문자설(無問自說)은 지시적 상담에 해당한다. 부처님에게는 지시적, 비지시적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설법이 제자를 궁극 목표와 실재로 이끄는가, 이끌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즉 목표 지향적, 실재 지향적 언어를 사용한 상담이고, 심리 치료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이 지시적이든 비지시적이든의 구분보다는 목표 지향적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불교 심리 치료와 불교 상담에서 언어는 목표 지향적이고 실재 지향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때 구업 소멸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윤희조|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동 대학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심리학사전』, 『불교의 언어관』 등의 역저서와 불교 상담 관련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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