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탄생-정신과 심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마음의 탄생』이 태어나기까지
『마음의 탄생-동양의 정신과 심론』이라는 책을 내놓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순자』, 『노자』, 『장자』, 『회남자』에 나타난 심(心) 또는 정신(精神)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수년에 걸쳐 따라가본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좋았던 이야기는 ‘고맙다’는 말이었다. 꼼꼼히 글자마다의 용법을 빼놓지 않고 정리해주어 보기 좋다는 것이었다. 스님의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맹자의 심도 빠질 뻔했고, 순자의 정신도 빼놓을 뻔했다. 다행히 대학원생이 그럼 책이 안 된다고 맹자도, 순자도 쓰라고 해서 보완했다.
맹자의 심론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맹자 성선설과 관련된 논의가 무척이나 많아 논란에 휩쓸릴까 봐서다. 나는 맹자의 심(心)을 다루지 성(性)을 다루지 않는다. 오늘날 심성론이라 퉁치지만, 이러면 안 된다. 고대의 용법에서 심은 심이고 성은 성이다. 정(情)도 마찬가지이다.
순자는 성악설로 유명해서 어쩔까 하다가 그의 정신을 찾아보니, 이게 웬일, 신명(神明) 이야기가 넘친다. 성인이 신명 나서 문명을 건설한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단다. 순자에게는 성정(性情)을 넘어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의 용법으로 과거를 본다. 아니올시다! 내 책이 바로 올바른 맥락 찾기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사 사장님이 ‘정신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고대의 용법을 제대로 밝히는 것이므로 괜찮을 듯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정신이나 심이 다름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의 탄생’으로 정했다.
우리가 아무리 심, 성, 정, 그리고 정신을 아울러 논해도 그 모두가 추구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였다. 현재의 우리말에서 현저히 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말이 지닌 다기(多岐)적이고 중층(中層)적인 뜻을 드러내려는 전초적인 작업이 이 책이었다. 마음은 얼마나 가로로 넓게 나뉘었고, 얼마나 세로로 높게 쌓인 말인가. 한 줄기인 줄 알았는데 끝없이 나뉘고, 한 몸인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이 거듭거듭 쌓여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었다.
이번 연재 ‘동양의 마음’은 6편의 글만 보면 이러저러한 용법이 있고 이리저리로 변해왔으니, 오늘 나는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겠는가를 생각하게끔 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다름 아닌 ‘마음공부’라면 어떤 마음을 가리키는지, 어떤 마음을 갖고 싶어 하는지 밝혀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닐까 한다. 앞부분에서는 유가, 도가, 불가의 철학이 말하는 마음을 소개하지만, 마지막 제6편에서는 마음공부를 말하면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마음, 참으로 넓은 세계다.
서양의 ‘마인드’는 머리에, 동양의 ‘마음’은 가슴에
먼저 가볍고 재밌는 이야기로 머리를 돌려보자. ‘마인드가 왜 이 모양이냐?’, ‘마인드가 글러먹었어’, ‘내 마인드는 이래’라고 말할 때 그 마인드(mind)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인드’를 ‘마음’이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영어의 맥락과 뜻이 같을까? 결코 아니다.
먼저 묻자. 마인드가 우리 몸 가운데 어디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인드는 가슴이 아닌 머리다. 서양인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마인드는 머리와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마인드는 한마디로 이성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라는 말이 서양의 전유물에 가까운 것과도 직결된다.
이성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것이다. 이성(reason)은 그 자체로 ‘판단하다’, ‘추론하다’, ‘설득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성은 한마디로 까닭(cause)이다. 따라서 이성은 전제이자 동기이자 조리다. 잘 쓰는 영어의 표현인 ‘이러는 까닭은 저렇기 때문에(The reason why A, because of B)’가 이성의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성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성은 추리(reasoning)와 같은 줄기다.
철학을 보라.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논증을 해야 한다. 저렇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거나, 저렇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들에게 논리, 증명, 논쟁은 숙명적이다.
그리스 시절에는 ‘누스(nous)’로, 로마 시절에는 ‘라티오(ratio)’로 이성은 그 위세를 떨친다. 오래된 서양철학 잡지 가운데는 『누스』도, 『마인드』도 있을 정도다. 이성은 서양철학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양도 그럴까? 아무리 철학의 활동이 까닭대기라지만 그 까닭을 머리에서만 찾아야 할까? ‘부모를 사랑하라’며 효(孝)라는 덕목을 말할 때 그 논거가 반드시 이성적인 것일까? ‘너를 부모가 키워줬으니 너도 부모를 봉양하라’고 할 때 ‘누가 나를 낳아달라고 했어?’라고 하면 논거는 어처구니없이 깨진다. 달리 말해, 어떤 논거는 다른 논거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그래서 상반된 철학자들이 등장하며 우리들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효라는 개념을 서양인들에게 설명하기가 가장 어렵다. 다른 것은 그런대로 비슷한 낱말이 있으나 효는 마땅치 않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 두 낱말을 겹쳐서 쓴다. ‘부모 자식 간의 X(filial duty; filial piety; filial obedience)’다. X의 값이 의무가 되었든, 경애가 되었든, 순종이 되었든 한마디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효를 말하면서 그것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떠올리고, 걱정하고, 모시고, 기린다. 그리하여 ‘멀리 있는 효자보다는 가까이 있는 불효자’가 되길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효자를 볼 때 효가 이성적인 것이랑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말해보자. 효는 자식의 ‘도리’이고, 효를 실천하는 사람은 ‘양식’이 있고, 효는 세상사의 ‘이치’이고, 따라서 효는 천지만물의 ‘조리’이다. 그런대로 자연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사전에서 이성의 번역어로 등장하고 있는 이 말들을 한번 이성으로 바꿔보자. 효는 자식이라면 지녀야 할 이성이고, 효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성 있는 자이고, 효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성이며, 효는 온갖 것들의 이성이다. 보라. 이렇게 효라는 말을 이성은 담지 못한다. 그것은 효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영역이 탈락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양의 마인드는 머리에, 동양의 마음은 가슴에 있다. 서양의 마인드는 오히려 ‘제정신이 들다(come to reason)’라는 표현처럼 ‘정신’에 가깝지 ‘심성’에 가깝지 않다. 심성은 고울 수 있지만 이성은 고울 수 없다.
유가, 도가, 불가의 마음
이야기를 줄여보면 철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이 과연 ‘착한 마음’이냐, ‘나쁜 마음’이냐는 것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맹의 ‘착한 마음’, 노장의 ‘맑은 마음’, 순자의 ‘신나는 마음’, 불교의 ‘한마음’으로 일단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는 어떤 마음을 추구하는가? 착한 마음인가, 맑은 마음인가, 신나는 마음인가, 한마음인가? 철학자끼리도 그런 마음을 놓고 주고받는다. 착한 마음에 가까운 맑은 마음일 수도 있고, 맑게 신나는 마음일 수도 있고, 하나로 모인 착한 마음일 수도 있다. 거꾸로, 맑지만 착하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고, 신나기만 한 미운 마음일 수도 있고, 착한 마음 때문에 한마음이 깨질 수도 있다.
결국 마음공부하려면 이 가운데 하나를 잡는 것이 좋다. 우리는 맑지만 어리석은 마음을 보고, 착하지만 사람을 나누는 마음도 만나고, 한마음이지만 신나지 않는 마음도 겪는다. 좋은 인간관계를 얻고자 하면 착한 마음이 좋고, 선악을 떠나 자유롭고 싶으면 맑은 마음이 좋고, 사는 것이 재미없으면 신나는 마음이 좋고, 삶의 구차스러운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면 한마음이 좋다.
어찌 네 가지 마음뿐이겠냐만, 이번 1년의 마음 찾기는 여기까지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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