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정견이 중요한 이유|정견(正見), 왜 중요한가?

한국 사회에서
정견이 중요한 이유

이필원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오늘날 우리에게 적합한 정견에 대한 설명은 『숫따니빠따』의 내용
한때 신문지상은 물론 방송에서도 ‘사회의 목탁’이란 표현이 자주 사용된 적이 있다. 목탁이란 불교에서 의식을 진행할 때 쓰는 도구다. 보통은 독경을 할 때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왜 목탁을 언급한 것일까? 그것은 목탁 소리가 욕망으로 치닫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바르게 세상을 보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딱딱딱딱’ 울리는 목탁 소리는 번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소리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리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가 맑아져서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무한히 욕망을 긍정하는 사회가 되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가 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사회가 된 것 같다.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감고, 권력과 자본의 힘에 우리 사회가 짓눌려버린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 목탁 소리는 거추장스럽고, 듣기 거북한 소리가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불교계조차 목탁 소리가 기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고따마 부처님께서 위없는 정각을 성취하신 뒤, 첫 설법의 주제로 삼은 것이 바로 중도인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극단으로 치닫는 마음을, 균형 잡힌 안정된 마음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다. 팔정도는 ‘정견’으로 시작해서 ‘정정’ 곧 ‘바른 선정’으로 끝난다. 바른 선정 뒤에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지혜’다. 그리고 삼학의 체계로 팔정도를 보면, ‘정견’은 ‘혜(慧)’, 곧 ‘지혜’의 내용이 된다.

팔정도를 어떻게 이해하든 정견은 지혜의 근간이자, 지혜의 내용이 된다. 이러한 정견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만족[苦, dukkha]’, ‘불만족의 발생[苦集, dukkha-samudaya]’, ‘불만족의 소멸[苦滅, dukkha-nirodha]’, ‘불만족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苦滅道,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에 대한 앎.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DN. II, p.312)

이것이 정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이다. 『맛지마니까야』 「정견경」에서는 그 외에도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의 뿌리를 아는 것, 혹은 자아의식(māna-ānusaya)을 제거하는 것 등을 정견의 내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의를 담고 있으면서, 가장 포괄적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적합한 정견에 대한 설명은 『숫따니빠따』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렵네.
현상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게 되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집착[된 견해들의 관점]에서 현상을 가볍게 보거나 고집하게 되네.(Sn.785 게송)
청정한 자에게는 실로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분별된 견해가 없다네.(Sn.786ab 게송)

『숫따니빠따』의 게송 통해 견해에 대한 고집이 갖는 위험 알 수 있어
『숫따니빠따』의 게송을 통해 견해에 대한 고집이 갖는 위험을 알 수 있다. 어떤 하나의 견해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고집해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을 선입견이라고 해도 되고, 편견이라고 해도 되며, 편향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구분한다. 이 구분의 기준은 ‘자신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은 ‘좋음’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쁨’이라고 규정한다.

세상에서 쾌락과 불쾌라고 말하는 것,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욕망이 일어나네.
형상들 가운데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보고서, 세상에서 사람은 판단을 하네.(Sn.867 게송)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사실은 이러한 판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옳음’과 ‘그릇됨’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옳고, 자신의 판단과 다르면 ‘틀렸다’는 강한 신념을 갖게 된다. 이 경우는 매우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과도한 견해로 완결되어 있네. 교만으로 미쳐 있고, 자만으로 넘쳐 있네.
스스로를 높이고, 마음으로 왕위에 오른 자가 되네.
그는 참으로 거기에서 그와 같이 견해가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네.(Sn.890)

‘바른 견해’는 ‘욕망의 노예’ 되어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망이자, 나침반
자신만이 옳다는 견해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과 교만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해 다투게 된다.

현대 한국 사회를 보면, 자신만이 옳다는 견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 목청 높여 외친다. 말 그대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신념이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무엇이 올바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순간, 옳고 그름은 이미 의미를 잃고 만다. 욕망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만든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이러한 사회가 아귀다툼의 사회가 아닐까.

자신의 욕망을 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거나 욕망의 실현에 걸림돌이 발생하게 되면 불같이 분노하게 된다. 자신이 신념으로 갖고 있는 ‘옳음’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타인과 세상을 향해 화살을 쏘고, 결국은 자신도 파멸로 이끌게 된다.

바른 견해가 없는 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그것은 권력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으며, 무력이 되기도 한다. 바른 견해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가 되어야, 평화와 공존이 가능해진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당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바른 견해’는 ‘욕망의 노예(taṇhādāso)’가 되어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안전망이자, 올바름·선함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이다. 불교에서 ‘분별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바른 견해를 가져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는 나의 욕망을 기준으로 분별한다. 그것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게 되며, 갈등을 부추기고, 결국은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지배하고 있다. 이념으로, 지역으로, 성별로, 물질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와 같다. 이렇게 가면 같이 망하는 공멸의 길이 기다릴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무엇이 옳은지 치열하게 사유하고 또 사유해야 한다. 그래야 다툼을 멈출 수 있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서로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혐오가 생겨났으며, 나는 그들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정확하게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끝까지 욕망을 향해 치달을 것인지, 욕망을 내려놓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야 할지를 말이다.

이필원|청주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으며, 일본 북쿄(佛敎)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WISE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성제 팔정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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