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선(禪)이 만나는 자리, 인제 설악산 백담사│하늘에서 본 아름다운 우리 절

시(詩)와 선(禪)이 만나는 자리
인제 설악산 백담사


‘백담사’에서는 ‘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뻔히 아는 결과에 기댄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 절이 없었다면, ‘님의 침묵’이라는, 우리말이 이룬 빛나는 성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일제 강점기의 우리 역사와 우리말의 처지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남루했을 것입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정식으로 계를 받은 출가 본사입니다. (1905년 1월 26일) 이후 스님의 행적을 이 지면에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줄로 압니다. 백담사와 만해 스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담사는 이른바 ‘만해사상’의 발원지였다는 점입니다.


3.1운동 이태 전 가을 백담사로 돌아온 만해 스님은 산내 암자인 ‘오세암’에서 참선 중 문득 한 소리를 듣고 ‘본분사’를 해결합니다. 그때 얻은 힘이었겠지요. 3.1운동 이후 영어의 몸이 된 스님은 ‘감옥’을 ‘극락’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을 나온 스님은 불교 개혁과 대중화를, 이 세상을 극락으로 바꾸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일이 어디 쉬웠겠습니까.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스님이었기에, 지옥의 얼굴을 한 세상을 보는 일이 쉬웠을 리 없었겠지요. 그럴 때, 스님이 갈 곳은 백담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설악으로 돌아온 스님은 오세암에서 수십 편의 시를 씁니다. 그중 하나가 ‘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것을 제목으로 앞세운 시집을 갈무리하면서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라는 글을 백담사 화엄실에서 썼습니다. 소심할 정도로 수줍어하는 글입니다. 당신을 시인으로서 독자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읽힌다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에 코를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진솔함 때문이겠지요. 스님이 노래한 ‘님의 침묵’은 청명하고 적막한 ‘법뢰(法雷)’로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울립니다.


만해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 후 또 한 시인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무산 스님입니다. 무산 스님은 과작의 시인이었지만, 이 나라의 빼어난 모든 시인들의 ‘귀명창’ 같은 시인이었습니다. 스님은 관음의 귀로 세상의 시를 거두었습니다. 시로써 이 세상이 ‘원통(圓通)’하기를 희구했습니다. 만약 만해 스님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인 양. 그랬던 스님이 지난 5월 26일 입적했습니다. 스님은 생전에(2018. 04. 05) ‘임종게’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춤, 그리고 법뢰(法雷)’(『문학사상』 2007년 4월호 발표)야말로, 무산 스님다운 임종게가 아닌가 합니다. 읊조려봅니다.

죽음이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늦가을 오후
개울물 반석에 앉아 이마를 짚어본다
어머니 가신 후로는 듣지 못한 다듬잇소리

시(詩)와 선(禪)이 만난 진경입니다. 살아서 죽은 수행자, 한 글자에 목숨을 거는 시인이 여기 있습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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