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의 시작점에 정견을 둔 까닭은 무엇인가?|정견(正見), 왜 중요한가?

팔정도의 시작점에
정견을 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현준
불교신행연구원 원장


‘나’부터 바로 보라는 정견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열반의 땅을 향해 뚫려 있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덕목인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각각을 우리의 몸에 대비시켜보자. 정견(正見)은 눈이요, 정정(正定)은 발이며, 나머지 여섯은 오장육부 등의 몸에 해당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만약 눈이 없다면, 열반의 땅으로 올바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못 갈 것이다. 설혹 간다고 해도 너무나 힘이 들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잘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견은 사성제의 고멸성제(苦滅聖諦, 열반)에 이르는 출발점이요, 끝까지 의지해야 하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정견이 없으면 열반의 땅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팔정도의 첫머리에 정견을 두어, 정견부터 갖출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있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가 정견을 첫머리에 둔 까닭이다. 시작점이 조금 어긋나면 도달점은 하늘과 땅만큼 멀어진다. 그만큼 첫걸음은 중요하다.

그럼 이 출발점인 바로 보는 정견(正見)을 할 때 정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나를 바로 보아야 한다.

흔히들 ‘본다’고 하면 바깥을 보는 것을 생각한다. 눈이 제 자신보다는 바깥을 잘 보기 때문인지, 밖을 보기를 좋아하고 밖을 중요시하며, 밖에서 구하고자 하고 밖의 것에 집착을 한다.

정사, 정어, 정업… 이때의 정(正)이 무엇인가? 내가 ‘바로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내가 바르게 말하고 내가 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나’이다. 모든 것은 다 ‘나’에게서 비롯된다. 모든 허물도 만선(萬善)도 ‘나’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밖을 보고 밖을 탓하고 밖을 다스리기보다는, 근원인 ‘나’부터 반성하고 ‘나’부터 막고 ‘나’부터 바로 보아야 한다. 내면의 ‘나’부터 바로 보아야 바른 길(正道)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나를 어떻게 바로 보아야 하는가? ‘나’에 대한 정견을 요약하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나’에 대한 정견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나의 불성에 대해 바로 보라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사성제의 첫 번째 가르침대로 ‘고(苦)’의 세계에 살고 있다. 생로병사를 피하지 못하고, 원수나 미운 사람이 있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세상,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숱한 번뇌로 속을 끓이고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에 살고 있다.

이 사바세계의 ‘고’를 통해 우리는 무상(無常)을 느낀다. 하지만 무상한 ‘나’, 그 나는 변화한다. 나의 환경도 변화한다. 환경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도 변화한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확실함을 보장해주거나 계속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변화하고 모두가 흘러가고 모두가 덧없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와 제행무상! 누가 이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잊고 사는 인간은 참으로 많다. 잊고 살다 보니 아주 큰일이 닥치지 않으면 ‘나’는 그렇지 않은 듯이 착각을 한다. ‘나’는 고와 무상으로부터 떠나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리하여 괴롭고 무상한 인생 전체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려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정견(正見)을 해야 한다. ‘고와 제행무상의 현실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똑바로 바라보면 괴롭고 무상한 ‘나’의 인생에 대한 집착을 서서히 놓게 되고, ‘이 고해(苦海)로부터 벗어나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이루고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정도를 실천해 무한 행복의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결심을 굳힐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나’에 대한 정견은 고의 원인인 고집(苦集)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라는 것이다.
왜 나의 인생이 고가 되었고 주위가 고해로 바뀌었는지를 스스로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삶 속에서 겪었던 근심과 고통을 이야기하라면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경험을 들겠지만, 그 근심과 고통의 원인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람과 물질’ 때문이요, 더 축약하면 ‘나’ 때문이다. ‘나의 사람’과 ‘나의 물질’ 때문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곧 괴로움의 실체는 ‘나’인 것이다.

그런데 ‘나’란 무엇인가? 나의 물질, 나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물질은 원래 ‘나의 것’이 없고, 사람 또한 영원한 ‘나의 사람’은 없다.

물질도 사람도 인연으로 ‘나’와 함께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인데, 무아임을 모르는 나의 어리석음〔아치(我癡)〕에 빠져들어서,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아견(我見)과 나에 대한 사랑인 아애(我愛)와 내 잘난 맛을 내세우는 아만(我慢)에 사로잡히고, 나의 물질과 나의 사람을 고집하는 것이다.

실로 모든 근심과 고난은 ‘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성제의 고집성제(苦集聖諦)에서 ‘갈애(渴愛)’라고 표현했듯이, 중생은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맞으면 탐욕의 불길을 일으키고, 나를 거스르면 분노하고 짜증내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갖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해, 가장 소중한 나를 고해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곧 ‘나’에 대한 애타는 사랑인 갈애가 탐진치의 삼독(三毒)을 뿜어내고, 이 삼독이 나를 괴로움의 세계에 갇혀서 살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벗어난 열반의 세계에 이르려면 갈애와 삼독을 다스려야 하고, 갈애와 삼독심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의 상태를 잘 돌아보고 지켜보아서 그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내면을 향해 나의 괴로운 삶을 만들어낸 원인인 고집성제를 꿰뚫어 보는 것! 이것이 두 번째로 보아야 할 정견이다.

세 번째 ‘나’에 대한 정견은 내가 ‘나’로 삼고 있는 자아(自我),
이 자아가 무아(無我)라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자아(自我)는 진짜 나가 아니다. 스스로가 세운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사랑으로 정립한 나요, 욕심과 망상, 어리석음으로 정립한 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거짓 자아 속에 갇혀서 살아간다. 마치 ‘나’라는 특정한 모양의 고무풍선을 만들어서, 그 고무풍선 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과연 고무풍선 안의 세계가 자유로울까? 갇혀 있으니 자유롭지 못하고, 두렵고 불안하며, 혼자만의 공상과 망상이 많고,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잘 입는다. 하지만 우리는 풍선 안의 세계에서 나를 고집하며 살고, 내 것을 고집한다.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자. 풍선 안의 공기와 풍선 밖의 공기가 다른 것인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갇혀 있기 때문에 ‘나’라는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음과 함께 그 풍선은 쪼그라들고, 또 다른 생을 받으면 업을 따라 또 다른 모습의 풍선을 불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이 풍선을 터뜨려보자. 그 순간 풍선 속의 공기는 그냥 그대로 풍선 밖의 공기와 하나가 된다. 그냥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얻을 뿐 아니라, 두려움 없이 자유롭고 불안감 없이 행복하고 티 없이 맑은 본래의 삶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풍선은 자아다. 내가 불어 만든 자아, 스스로 만들어낸 자아다. 원래 허공에는 이러한 자아가 없으며, 풍선은 터지면 그대로가 대법계(大法界)다. 이렇듯 풍선과 같은 자아가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며, 내가 고집하고 있는 자아가 원래 없다〔무(無)〕는 것을 ‘꿰뚫어 볼 때’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삶이 열리는 것이다.

‘나’의 인생살이에 있어 모든 고락의 근원이 되는 ‘나’를 바로 보는 정견! 이 정견이야말로 도(道)의 출발점이다.

설혹 ① 괴롭고 무상한 ‘나’, ② 갈애와 탐진치 속의 ‘나’, ③ 무아인 ‘나’를 생각하기조차 싫을지는 모르지만, 이것을 긍정하고 올바로 볼 때 대자유와 무한 행복을 보장하는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꼭 명심하고, 무엇보다 먼저 ‘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기 바란다.

“털끝만큼만 어긋나도 하늘과 땅만큼 멀어진다〔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는 『신심명(信心銘)』의 말씀 그대로, 출발점에서 ‘나’를 바로 보지 않고 살면 도달하는 점은 하늘과 땅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김현준|불교신행연구원 원장. 평생을 불교 수행과 포교와 연구에 몰두했으며, 현재 조그마한 잡지를 내고 글 쓰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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