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벽돌 탑에 남은 향기는 누구의 향기인가|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한 송이 벚꽃과
안산암 벽돌 한 장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당신은 벚꽃 향기를 맡아본 적 있습니까?
- 상상 향기
경주의 봄은 하얗게, 눈처럼 온다.
오릉 돌담길, 영지 설화 공원, 홍무로, 대릉원 돌담길, 황룡사 마루길, 보문단지에 하얗게 봄이 피어난다.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하얀 꽃잎들이 흩날린다. 사람들은 이 황홀경을 보러 나온다. 그래서일까, 현대의 사람들은 ‘벚꽃 향이 너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벚꽃 향’ 화장품이나 향수, 세제를 만들어 쓰기도 하더라.

그런데 벚꽃에 향기가 있었던가? 내가 아는 벚꽃은 향이 거의 없다. 한 송이 벚꽃은 더욱이나 향이 없다. 하지만 봄을 알리려 벚나무에 무더기로 피어난 벚꽃이 군상을 이루면 말이 달라진다. 향기는 분명, 없다 싶은 꽃나무건만 멀리서 이 벚꽃길을 보고 있노라면 황홀경에 빠져 그 바람 끝에 향이 느껴진다고 상상하기에 이르고, 내 코끝까지 그 향기가 밀려든다. 함박눈처럼 털어내는 봄의 비늘…. 봄 햇살을 머금은 듯도 하고, 하얀 꽃잎 끝에 분홍 물이 들어 소녀의 팔랑거리는 단발머리에서 새어 나오는 비누 향 같기도 하다. 벚꽃잎들이 다양한 상상을 자극하는 향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무리 지어 하나의 아름다운 벚꽃길을 이루었기 때문은 아닐까.

용기 내어 그 길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상상 향기’다.


한 송이 벚꽃처럼 향기 없는 벽돌 한 장의 집
– 분황사 모전석탑
나는 저 황룡사 마루길 벚꽃 한 송이와 다를 바가 없다. 흑회색 벽돌 한 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내 친구들을 보러 온다. 내 몸에서 부처의 향기가 난다고도 하고, 선덕여왕의 향이 난다고도 말한다.

나는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국보 제30호)을 이루고 있는 흑회색 안산암 벽돌이다. 국보씩이나 되니, 전문가들은 나와 같은 모전석탑의 안산암 벽돌들을 귀하게 여겨주고 있지만, 난 봄이 되어 벚꽃길을 볼 때마다 한 송이 벚꽃과 한 장의 벽돌이 어떻게 귀한 몸이 되는지 느끼고, 깨닫고, 그때마다 마음 깊이 감사한다.


안산암을 구하러 온 서라벌 백성들
– 전불시 칠처가람의 명령
내가 태어난 것은 수만 년 전이었다. 화산이 터졌다가 식으며 요즘으로 치면 경상남도 양산시의 흑회색 지층으로 살다가 1400년 전쯤 어느 날, 사람들이 내 몸을 캐내기 시작했다.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세상을 보게 된 그날은 631년 늦봄이었는데, 경주에서 온 사람들이 시커먼 돌덩이인 나를 캐고, 자르고, 옮기면서 말했다.

“선왕이 돌아가시고, 최초의 여왕님이 나오셔서 서라벌에 ‘전불시 칠처가람’을 만드시는데 우리가 힘을 보태니 얼마나 복 받았는가!”

전불시 칠처가람(前佛時 七處伽藍)이란,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기 전 과거 7명의 부처들이 신성한 7곳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행했다는 터전을 말한다.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담암사, 흥륜사, 영흥사, 영묘사가 그곳이다. 천년 세월 끝에 이제는 모두 절터로만 남아버렸고, 그나마 내가 있는 분황사는 모전석탑이 남아 있어 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벽돌 탑에 남은 향기는 누구의 향기인가
백성들이 말하던 여왕은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황룡사를 지으면서 그 옆에 분황사 또한 짓도록 했는데, 분황사 한복판에 특별한 탑, 모전석탑을 짓게 했다. 알고 보니, 경주에는 안산암이 없어 경주 백성들이 신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안산암을 구해왔던 것이었다. 그 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온 승려들부터 신심이 두터운 백성들까지 다 달라붙어 안산암을 깎았다. 일일이 자르고, 갈아서 네모난 벽돌 모양을 만들었다. 내 몸은 꽃잎처럼 한 장 한 장의 벽돌이 되었는데, 약 20장 정도의 벽돌이 나온 것 같다.

전국에서 모인 안산암을 깎아 벽돌을 만들고 쌓으며, 이 탑 안에는 수많은 염원들이 깃들었다. 어느 20대 유학파 스님은 미륵불을 현생에 만나게 해달라고 빌면서, 아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극락에 가게 해달라 빌었고, 자진해서 벽돌을 우물물에 씻어 말리던 환갑 넘은 노비는 자식들이 굶지 않고 살게 해달라 빌었다. 당시 분황사에 부임해온 원효대사는 매일 새벽 예불 때마다, 아직 작업 중인 모전석탑 주변을 돌며 이 나라에 최초의 여왕이 나셨는데, 당나라 황제가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이 나라가 불국토가 될 수 있기를 벽돌 하나하나에 기원했다.


모전석탑 벽돌이 선사하는 봄의 선물
당신이 어디에 있든,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이 순간 코끝에 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벚꽃길에서 맡은 상상 향기처럼, 칠처가람에서 불어오는 불법의 바람이 길을 내었으니 그 길 한가운데에서 분황사 모전석탑 앞에 도달한 당신의 코끝에 어떤 향기가 느껴질지 궁금하다.

천년 벽돌 한 장이 드리는 봄의 선물이다.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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