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개 3년의 풍월이 곧 문화다|나의 불교 이야기

서당 개 3년의
풍월이 곧 문화다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서양 철학, 현대 과학을 알게 되면서
성장기에 밴 문화가 혜택이었다는 것 알아
다섯 살 때였다. 부여 무량사에서 후원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었던 것 같다. 무심코 난간을 짚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습자지 느낌이 들었다. 잠자리 날개였다. 곧바로 두 손가락을 딱 붙였고 한쪽 날개를 잡힌 잠자리가 손등에서 바들거렸다. 사실 어릴 적 기억 속 공간은 믿을 만하지 않다. 멀리서 뛰어와 건너던 부여 정림사지 개울이 마흔 넘어 보니 한 걸음도 안 되었으니까. 무량사 공간에 대한 기억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 감각은 날것 그대로다. 버둥거림을 잠시 느끼고 힘을 풀었다. 잠자리는 날아갔다.

13년 전, 딸이 네 살 때였다. 오빠가 운동장에서 축구 연습을 하는 동안 형을 따라온 또래 사내아이와 나무 그늘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아이들의 막대가 개미집을 헤집었나 보다. 느닷없이 개미 무리가 두 아이의 여름 샌들을 타 넘으며 지나갔다. 사내아이가 발을 구르며 개미들을 죽였다. 당혹스러웠다. 재빨리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지만 잔혹한 기분에 씁쓸했다. 거리낌 없던 발 구르기가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내치는, 무서우면 낮추고 만만하면 거침없는 인간의 원초성인가 싶었다. 개미도 자신의 영역에서 개미의 삶을 살 뿐인데… 미안함이 사무쳤다.

내가 자란 집에서는 가능하면 집 안에 들어온 파리나 벌레를 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부모님이 그랬고, 종종 방문하시던 스님들이 그랬다. 모기만은 예외였는데, 비록 모기를 죽였어도 세상 사는 방식에 대해 잠시나마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도록 이끌었다고 항변하고 싶다. 이런 삶의 형태가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음을 알고 난 다음에야 내게 기회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양 철학, 현대 과학을 알게 되면서 성장기에 밴 문화가 혜택이었음을 알았다.

유년 시절 만화와 잡지 속 불교 우화, 웃긴 일화 읽고,
삼청동 칠보사 어린이 법회에도 다녀
초등학생 때부터 우리 집에는 월간지 『불광』이 배달되었다. 이모나 삼촌이 사다놓은 『리더스 다이제스트』도 거실 탁자에 올려져 있곤 했다. 먼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기사 사이마다 토막토막 실려 있던 웃긴 일화들부터 킬킬거리며 읽었고, 『불광』을 열어 어떤 그림 잘 그리는 거사님의 만화와 불교 우화를 읽었다. (기억이란 참 신비롭다. 양파 껍질을 손톱을 세워 한 조각이라도 벗기고 나면 후루룩 알맹이가 튀어나오듯, 지금 그 만화가 이름이 달공 거사라는 게 생각났다.) 그때는 남자는 거사 여자는 보살이라고 부른다고만 짐작했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울 아버지가 덕연 거사, 울 어머니가 청정심 보살로 불렸으니까. 거사나 보살의 뜻이 경전에 근거한 호칭이며 가르침을 삶으로 구현하도록 프레임 지우는, 꽃이라 부르면 꽃이 되어 다가오듯 상호작용 속에 법답게 살려는 불교도의 의지라는 것도 나중에야 헤아렸다. 다만 만화에 홀려 알지 못한 채 『백유경』과 『법구경』을 읽던 유년이다.

미국으로 이주해 살면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즈음, 이곳저곳을 무작정 방문한 뒤 발도르프 교육을 하는 유치원을 선택했다. 지식을 가르치기보다 흙에서 뒹굴고 나무 타고 동물들과 교감하며 내면을 발산하도록 이끄는 학교다. 첫 학부모회의 날이 인상적이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이야기했는데 스무 명 남짓한 부모 가운데 반 넘게 어려서 다녔던 유치원에 질려 발도르프에 왔다고 했다. 한 명이 그때 일화를 말하자 화음 쌓듯 끼어들며 와글와글해졌다. 공통적인 한 가지가 수녀 선생님들이 너무 무서웠다고, 규율이 빡빡해 늘 얼어붙었다고 했다. 나는 수녀 선생님들이 종교적 원죄의식을 갖고 엄하게 했다기보다 이들이 유치원에 다녔던 1970~1980년대 미국 사회의 아이를 대하는 시선일 수 있겠다 생각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삼청동 칠보사 어린이 법회에 갔다. 석주 스님께서 워낙 아이들을 귀히 여기셨고 부처님 마음이 곧 어린이 마음이라며 강조하셨다. 운 좋게도 곧이어 칠보어린이합창무용단 단원이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무대에도 서고 미국 일본 공연을 다녔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말마다 연습을 해야 했다. 40명 넘는 아이들이 겅중거리고 목청 높여 노래하며, 때로는 바라춤 장고춤 농악무 연습에 타악기 두드리던 곳이 법당이었다. 신도들이 법당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고, 정신 사나워 기도는커녕 참배도 불편하다고 했다. 이 모든 불만을 스님들이 경전을 인용하며 잠재웠다. 그러나 당시 어린이를 환대하는 도량은 많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삼청동까지 갔던 이유다. 1980대 초다.

우리가 전체 속의 일부이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체계는 나의 탐구의 원동력
공기처럼 내 안에 스며든, 모든 이에게 선한 본마음이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 체계는 두고두고 이로웠다. 그 본성이 드러나도록 사회 시스템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나와 남의 마음 작용이 서로 응하면서 우리의 일상이 흘러간다. 어디까지 나의 마음일지 경계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게 우리는 전체 속의 일부이자 연결되어 있기에 스스로 변화한다면 전체의 성질은 바뀌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은 2012년부터 문명의 현재를 세계 석학들에게 묻고 대안을 모색하며 2021년 인류 문명의 10년 생존 전략을 석학들과의 대담으로 제시하기까지 탐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현대 과학을 배움에 있어서도 어린 시절의 환경은 유익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을 때, 왜 그리 같은 줄기의 내용을 이리저리 집요하게 예시 들어 설명하나 의아했다. 내게는 개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해온 사실이 자연스러운 논증인데, 제자리를 돌며 증명하고 또 증명했다. 다윈은 개별 생명체가 계획된 의도에 의해 탄생했다는 서구 독자들의 신념에 허점을 벌려 생명망이 생존하는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신념 체계를 반박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기본 전제에 갇혀 있지 않았기에 앎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2013년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와 대담할 때였다. 그는 불교와 과학이 잘 통한다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 존자와 이야기 나누며 기쁨을 누렸다고. 비록 내가 세상의 이치에 밝지 못하다 해도 생각 체계 속에 어떤 걸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풍월으로나마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문화적 축복을 누렸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세상 모든 생명체가 종(species)을 넘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멸종의 시기를 사는 21세기 인간에게 사려 깊은 일상을 살도록 삶의 감각을 깨우는 안내라고 생각한다. 잠자리, 개미의 아픔을 인지함으로써.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놈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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