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갈등에 대한
불교 경전의 가르침
이미령
동산불교대 교수
큰스님을 모시려는 부부와 어린 사미 이야기
“여보, 지금 빨리 절에 가서 나이 지긋하고 도가 높은 스님 네 분을 모시고 오세요. 마음을 담아 공양을 올리고 싶어요.”
아내의 부탁을 받은 남편이 부리나케 절로 달려갔습니다. 절에서 소임을 맡은 스님이 수행자 네 사람을 지목해서 남편을 따라가 공양을 받게 했지요.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어리디어린 일곱 살짜리 어린 사미였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큰스님을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남편이 모시고 온 어린이 네 명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큰스님을 모시고 오라 했더니 손자뻘 되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왔군요.”
아내는 낮은 곳을 가리키며 그 ‘어린애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기 앉거라.”
남편은 나이 지긋한 큰스님들을 모시고 오기 위해 다시 절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사리불 존자를 만나서 집으로 모셨지요. 사리불 존자가 그 집에 도착하자 어린 사미 네 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 부부에게서 공양을 받았습니까?”
그럴 리가요. 애들에게 주려고 이 귀한 음식을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음식을 받지 못했다는 어린 사미들의 대답을 듣자 사리불 존자는 “이분들에게 공양을 올리십시오”라고 말하고서 자신은 그냥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목련 존자를 집에 모셨지만 마찬가지였지요.
이러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어린 사미 네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런 음식을 받지 못해 쫄쫄 굶고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나이 지긋한 큰스님이 아니면 그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내의 마음이 통했을까요? 홀연히 나이도 많고 덕도 많아 보이는 수행자 한 사람이 부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부부는 감격해서 그를 공손히 맞이해 가장 높은 자리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늙은 수행자는 어린 일곱 살짜리 사미들에게 오체투지를 한 뒤 그들의 끝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어리둥절해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당신 아버지뻘인 분을 모시고 왔네요. 그런데 이분은 자신의 손자뻘 되는 자들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군요. 당장 이 사람을 쫓아내세요.”
남편이 그 늙은 수행자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었지만 요지부동! 결국 아내까지 합세해서 죽을힘을 다해 그를 끌어냈습니다. 숨을 돌리며 집 안으로 들어온 부부는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늙은 수행자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연은 이랬지요. 늙은 수행자는 제석천이었습니다. 어리디어린 일곱 살짜리 사미들은 사실 아라한이었습니다. 아라한이란 세상의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성자(응공)들인데, 그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으니 제석천이 보다 못해 지상으로 내려와 이들 부부를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법구경』 406번째 게송 「인연이야기」)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잣대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어르신’이고, 자기보다 나이가 적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금을 그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 사람은 당연히 성숙하게 행동해야 하고,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건 다 서툴게 보여서 혀를 찹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 나이를 가늠해 고정관념을 품고 있으니 세대 갈등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10대, 20대여도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고, 50, 60대 그 이상의 나이를 먹어도 어리석은 짓을 범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라며 제 마음대로 잣대를 들이대면, 앞선 부부의 경우처럼 헛발질을 하게 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바라문 한 사람이 가전연 존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졌지요.
“당신은 연로해 인생의 대선배인 바라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맞이하거나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수행자가 그러면 되겠습니까?”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은 계급이 가장 높았고, 나이가 많은 바라문은 특히 더 존경을 받았지요.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이란 사람들이 그런 풍습을 무시하니 한 수 단단히 가르치러 온 게 틀림없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나이 든 자의 입장과 젊은이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 여든, 아흔, 백 세가 되었더라도 욕망에 빠져 지내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면 그는 어리석은 장로요, 아직 나이 어린 새파란 젊은이라 해도 욕망을 즐기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 있다면 그는 슬기로운 장로라 부른다고 말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나 아직 안 늙었다. 아직 내 마음은 청춘이다’라고 외치라는 건 아닙니다. 마음공부를 진지하게 하며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 사람을 젊은이와 노인으로 나누는 기준이요, 세상의 존경을 받는 어른(노인)이 되고 싶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무조건 나이 든 세대의 연륜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숱한 경전에서 어른을 존경하라고 당부하기 때문입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도 착한 법이 무엇이냐고 여쭙는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모에게 효순하고 사문과 바라문에게 공양하며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선업을 짓는 일이오.”
어른 공경이 착한 법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젊은 세대가 그런 공경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게 도전하고 저항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백유경』에서처럼 말입니다. 뱀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 꼬리가 머리에게 투덜거렸습니다. “왜 맨날 너만 앞서는 거야? 이제부터는 내가 앞에서 가겠어.”
“언제나 내가 앞에서 갔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머리는 꼬리의 불만을 무시하며 앞에서 갔지요. 꼬리는 화가 나서 나무에 제 몸을 감아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머리는 꼬리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꼬리가 기세 좋게 앞장서 가다가 불구덩이에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뱀의 머리는 연로한 스승을, 꼬리는 젊은 제자를 가리킵니다. 젊은 패기로 나이 든 스승을 밀쳐내고 길잡이가 되지만 인생의 지혜가 없고 계율을 잘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끝내는 자신뿐만 아니라 윗세대까지 불행에 빠뜨린다는 『백유경』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윗세대 말을 잘 듣고 대들지 말라고 할 건가요? 아닙니다. 젊은 세대는 저항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기성세대는 “그것 봐라! 어른 말 들어야지!”라며 꾸짖기보다는 저들과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나이 아닌 개인의 정신적 성숙 우선하는 게 세대 갈등에 대한 불교의 생각
공파 스님은 말씀합니다.
“나이가 많다고 우세하지 마라. 나이는 성숙의 보장이 아니다. (…) 사람들은 노인이 어른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노인이 어른이 되어야 할 의무도 없고 자질도 없다. 그저 윤회하는 과정에서 늙은이로 되어 있을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것은 본인의 사정이지 젊은 사람들이 알아줘야 할 일은 아니다.”(「발심수행장 열강기」에서)
왜 자꾸 나이를 들먹이며 세대를 가를까요?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 어떻고, 나이가 적으면 어떻단 말인가요? 나잇값을 하라고 하지만 이 또한 착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젊고 늙음은 육신의 나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사실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나 삶에 녹이 슨다”(『법정잠언집』)라고 말씀하셨지요. 그저 나이라는 숫자로 세대를 나누기보다 한 개인의 정신적인 성숙을 우선한다면 세대 갈등 같은 것은 비집고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동국역경원에서 숱한 경전들을 번역·윤문하는 일을 했고, 현재 동산불교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번역가, 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비롯한 책 읽기 모임과 경전 읽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이미령의 명작산책』, 『붓다 한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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