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꽃 소식을 듣는 일|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생태 그림 순례

산다는 건 꽃
소식을 듣는 일

글/그림
이호신 화가

돌아온 봄, 89x181cm, 2022년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소리’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이다.”

생전의 법정 스님 말씀이 떠오르는 봄날이다.

뜨락의 매화나무를 겨우내 마음 곁에 두고 서성거린 나날이 얼마인가. 그 긴 기다림에 꽃망울이 벙글자 꽃이 피고 나는 어김없이 화첩을 챙긴다.

실은 어느 봄날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소리’라고 쓰고 홀로 기뻐한 때가 있었다. 산골에 사는 이가 잠시 귀가 열린 일로.

오래전 산청에 화실을 마련하게 된 까닭은 산청 3매(원정, 정당, 남명매)를 그리고 귀촌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봄이면 길손들을 맞이해 매화 홍보로 길라잡이를 자처한다. 봄 마중의 진정한 뜻을 나누며.

하동 화개의 봄, 65x267cm, 2022년 

내가 숭상하는 조선의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년)의 글이 늘 위안이 되거늘

“매화는 정고(貞固)한 본성과 빼어난 덕을 지니고 있으니 아무리 높이고 애호하여 벗으로 삼는다 하여도 지나친 일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중에서)

그러나 어찌 봄소식이 매화뿐이랴. 하동의 벚꽃과 구례의 산수유가 잇따라 피어나니 비로소 지리산은 기지개를 편다. 어머니의 산 품속으로 사람들을 부른다.

그중 하동 화개의 봄은 천지가 환하다. 풀린 계곡물은 모두 섬진강으로 합류하는데 청학동의 불일폭포가 학의 형상으로 비상한다. 서산대사 출가지로 알려진 원통암과 건너 산의 칠불암을 내려와 쌍계사에 이르는 강가의 들은 온통 연초록의 차밭이다. 생기가 그윽하니 봄의 기운을 더한다. 마침내 화개장터에 이르는 십리 벚꽃은 가히 꽃 대궐이요, 꽃 터널이다.

섬진강의 봄, 270x176cm,  2021년

이 유장한 섬진강을 거슬러 터진 고매(古梅) 앞에 이르자 강은 흘러내리고 꽃가지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음양의 이치요, 상생의 조화이다. 이처럼 돌아온 봄의 숨결을 만끽하는 순간에는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진다.

산청 남사리 원정매, 166x262cm, 2008년 

한편 문명의 진화로 AI 시대가 도래해 꿈같은 현실이라지만 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 편의와 안락을 위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하지만 대지를 딛고 사는 한 우리는 해마다 봄 마중을 기다릴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꽃 소식이 없다면 행복할 수 없을 테니.

이호신
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