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의 즐거움|10분으로 배우는 불교

명상 수행의 즐거움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수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즐거움(sukha)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 두 명상 수행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수행자는 어느 날 앉아 있는 동안 시공(時空)이 끊어진 깊은 삼매를 경험했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라만상이 이해되는 체험이었다. 이 경험을 한 이후로 그는 명상할 때마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집중해 일심(一心)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높은 차원의 명상 경험은 다른 한편 우월감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두 번째 수행자도 꾸준히 명상을 수행했다. 비록 그는 수련하는 동안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삼매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대신 자신의 호흡과 몸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더 많은 통찰력을 키우고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자주 느꼈다.

이 이야기는 두 수행자의 명상 방법이 어떻게 다른가를 부각하려는 게 아니고, 그들이 명상을 통해 서로 다른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명상에서 얻는 행복이 다르다는 것은 명상 수행자들이 모두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수행과 함께 일어나는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따라 수행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첫 번째 수행자는 선정에서 오는 깊은 삼매의 체험을 성취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성취를 또 얻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한다. 그러한 성취가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대단한 경험은 자신이 다른 수행자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켜 자부심이 한껏 고양된다. 두 번째 수행자는 깊은 삼매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 주의를 두면서 수행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과 평온한 즐거움이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수행자 모두 명상 수행에 힘쓰고 있지만, 그들이 명상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서로 다르다.

붓다(Buddha)는 수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즐거움(sukha)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양한 종류의 즐거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여라.”(『맛지마 니까야』, 「무쟁(無諍)을 분별하신 경」)

즐거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 통해 즐거움에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다양한 즐거움에 관해 설명한다. 감각적 쾌락, 환경이 마음대로 변할 때 얻는 즐거움, 선한 행위 속의 즐거움 등과 같은 생활 속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선정에서 오는 즐거움과 고행에서 오는 즐거움 등과 같이 수행 속에서 얻는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행복(즐거움, sukha)과 불행(괴로움, dukkha)의 양측을 오가는 가운데 느끼는 상대적인 즐거움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의 즐거움이라서 애착이 잘 일어나고 또 느끼고 싶은 욕구가 언제나 함께한다.

수행 중에도 감각적인 즐거움이나 정신적인 즐거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이러한 즐거움이 또 얻고 싶은 목표나 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수행이 본래 의미를 잃고 보상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 즐거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즐거움에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상대적인 차원에서 벗어난 즐거움에 대해 가르쳐주셨다.

마음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 문제점을 의식화한 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
심리학자이자 불교 수행자였던 존 웰우드(1943~2019)는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라는 말로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에 관해 설명했다. 영적 우회는 수행자가 인간성의 부정적이고 원시적인 측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시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초월했다고 믿는 경향을 의미한다.

“우리(명상 수행자)는 더 높은 차원의 마음 상태를 얻기 위해 진실하게 노력하지만,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인 문제를 미해결된 상태로 내버려두고, 그것에 다가가기를 꺼린다. 수행하는 우리는 특히 명상이라는 수행법을 이러한 내면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영적 우회다”라고 웰우드는 말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이 강해질수록 ‘하늘을 꿈꾸고 땅을 잊어버리는’ 수행자가 된다. 즉 초월적인 마음의 상태를 추구하면서, 인간성과 접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적 우회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선하지 않은 마음과 행위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지, 악한 마음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 문제점을 의식화한 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의 가장 심오한 깨달음의 원천이 바로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의 인간 본성이라고 가르쳐주셨다.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 양면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수행자는 오히려 수행을 통해 행복만을 좇는 오류를 범한다. 영적 우회도 행복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오는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본성상 밝고 긍정적인 측면과 어둡고 사악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의 ‘나’를 좋아하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믿음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영적 우회는 이런 즐거움에 대한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밝은 측면만을 자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부족하고 어두운 측면을 수용하는 마음이 약해져서 인간성 전체를 아우르는 부처님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다.

높은 차원의 즐거움은 수행을 통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마음의 세계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행복이 있는데, 수행을 통해 낮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점차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괴로움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쾌락적인 상태를 좋아하지만, 수행의 공덕이 쌓이면 명상 수행과 타인을 돕는 것에서 얻는 행복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행복도 가장 높은 차원의 행복이 아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행복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면서 얻는 행복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붓다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파고가 없는 평온한 고요함이 있는 상태의 즐거움(sukha)을 설명한다. 이러한 높은 차원의 즐거움은 수행을 통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보통 사람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에 애착해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나중에 괴로운 느낌으로 변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불만족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붓다는 몸과 마음을 닦는 특별한 훈련을 권한다. 그것은 일어나는 즐거움을 지켜보면서 그 즐거움이 마음에 머물러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훈련이다. 즐거움에 애착하지 않고 즐거운 느낌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마침내 평온한 즐거움이 일어난다.

이러한 바라봄과 알아차림은 감각적인 즐거움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선정의 수행 속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도 마찬가지로 바라본다. 수행을 통해 어떤 즐거운 느낌이라도 그 본성을 이해하게 되면 고통의 원인이 소멸한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다. 명상 수행을 통해 얻는 참다운 즐거움은 바로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힘이 있을 때 얻는 이러한 즐거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다운 선(善)은 이 높은 차원의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다.

문진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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