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꿰뚫어 보는
『금강경』의 반야 공식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세간의 이목이 집중한 만남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난존자는 당황해하며 반문했습니다.
“네? 고행자 잠부까에게 가시겠다고요? 정말입니까?”
그 당시 잠부까는 오십 년간 바람만 먹고 살아온 위대한 고행자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이러한 잠부까와 부처님과의 만남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이 만남의 승자는 누구일까? 누가 누구의 제자가 될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승패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 만남의 승자는 당연히 부처님이었습니다. 잠부까는 거짓된 명성을 내려놓고 부처님의 발아래 엎드려 예배한 후 가르침에 순응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됩니다.
반야 공식의 논리
『금강경』은 반야와 자비, 즉 보리심의 경전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보리심인 금강심의 실천 방편으로 ‘즉비시명(卽非是名)’ 공식을 반복해 제시합니다. ‘즉비(卽非)’란 대상에 대해 개인이 가지는 어리석은 상념(相念)에 대한 부정이고, ‘시명(是名)’이란 그 상념을 부정한 이후의 있는 그대로 보는 대긍정을 말합니다. 이 공식이 반야의 ‘즉비’와 자비의 ‘시명’이 함께 하는 보리심 실천의 도구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문장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성철 스님이 남긴 유명한 법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법어는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의 법문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3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즉비시명’의 공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그 뒤 훌륭한 선사를 만나 선의 진리를 찾았을 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쉴 곳인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은 진정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가장 먼저 1구는 세간에 통용되는 상식으로 ‘산을 산’으로 보는 고정관념입니다. 범부가 인식하는 산은 있는 그대로의 산이 아니라 산에 대한 심상(心相)입니다. 이는 실제와 일치하지 않기에 허상입니다. 이 허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범부의 무명입니다.
2구는 ‘즉비’의 이치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산뿐만 아니라 강, 육체 등 눈앞의 모든 것, 즉 만물과 진리까지도 모두 관념이기에 그 허망함을 분명하게 알 때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구는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을 뜬 후 바라보는 세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허상에서 벗어나니 있는 그대로(=여래)를 볼 수 있고, 그렇기에 산과 만물의 진정한 모습을 대긍정하는 시명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에 속는 사람들
지혜의 눈이 열리는 공식이 ‘즉비’로 시작하는 이유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범부의 속성 때문입니다. 잠부까는 명성과 달리 바람만 먹는 위대한 고행자가 아니라 전생의 악업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하고 똥만 먹고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잠부까는 전생에 벽지불에게 질투를 느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스님은 신도 집에서 공양하느니 차라리 똥이나 먹지 그래.”
이렇게 말한 후, 그는 2만 년의 여생 동안 간절히 정진했으나 수행의 성과는 거의 없고 악업에 대한 과보로 수천 겁의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았습니다. 이후 간신히 인간으로 태어나 퍼부었던 저주를 그대로 되돌려받아 똥만 먹는 잠부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부까를 본 사람들은 ‘바람만 먹고 살아간다!’라는 그의 거짓말과 겉모습에 속았습니다.
사실 범부의 세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므로 감각, 감정 그리고 생각을 무작정 신뢰하면 안 됩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 이를 통해 오해를 겹겹이 쌓는 것은 흔히 범하는 실수입니다. 지혜롭고 싶은 수행자라면 범부의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비시명’의 공식을 활용해야 합니다. ‘안다’라는 착각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게 하고 눈을 가리게 합니다. ‘모른다’라는 태도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을 뜨도록 만듭니다. 꿰뚫어 봄의 지혜를 원한다면 먼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도록 눈을 떠야 합니다.
꿰뚫어 보기
범부는 겉모습을 보고, 지혜로운 성자는 본질을 봅니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1구에서 벗어나 2구의 즉비를 통해 허구성을 인지해야 합니다. 『금강경』의 「여리실견분」에서는 이를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모른다’라는 것을 인정할 때, 위빠사나의 관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비’의 힘으로 눈을 떴다면 다음 단계인 3구로 나아가야 합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내용은 ‘시명’의 공식을 훈련하는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을 상 아님’으로 바라보는 청정한 그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대자비심으로 세상을 관찰해야 한다는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상(眞實相)인 여래를 꿰뚫어 본다면 산이 진실로 산이었음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잠부까가 과거생의 악업에 대한 과보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과 2만 년 동안 수행 정진했던 공덕을 동시에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여실지(如實智)를 바탕으로 위선에 머물던 잠부까를 아라한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이처럼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보는 힘, 악업에 숨겨진 선업을 보는 힘, 업의 복잡성 속에서 핵심을 보는 힘 등을 포함합니다. 수행자의 본분사는 오직 이 ‘즉비시명’의 힘을 갈고닦는 것입니다. 이제 잠부까의 인연담을 담고 있는 『법구경』 70번 게송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오랜 세월을 풀잎 끝에 묻힌 음식만으로 아주 적게 먹고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할지라도 성인들이 깨달은 법의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에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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