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의 무정설법
울진 불영산 불영사
겨울 아침 햇살은 다정합니다. 낮은 자세로 멀리서 일어서서, 한 번도 누군가를 쏘아본 적이 없는 시 선으로, 방 안 깊숙한 구석의 어둠까지 섬세하게 어루만집니다. 적막한 겨울 숲속의 다람쥐, 토끼 굴 속에서도 그렇게 아침이 찾아들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육체적 삶의 높이가 낮았던 시절, 시간의 저편 먼 기억일수록 따뜻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삶의 원형질 같은 것이 기 때문이겠지요. 불영사는 나에게 그런 기억 속의 절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어딘가를 가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초가을 때의 일입 니다. 소풍만 가도 며칠 전부터 설레던 시절, ‘수학여행’이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달고 ‘대절’ 버스를 타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렇게 간 곳이 ‘불영사’였습니다. 내가 다녔던 울진남부초등학교에서 그곳까지는 50리(20km) 길이었는데, 요즘이야 지척으로 여기는 거리지만 당시 우리들에겐 아주 먼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시작과 함께 끝났습니다. 아스라한 벼랑에 걸터앉은 길을 끝없이 굽이도는 것은 열 살이 조금 넘은 아이에게 ‘죽음’을 현실의 문제로 인식하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길이 바 로 울진~봉화~영주를 잇는 36번 국도가 지나는, 광천(光川)을 품에 안은 협곡과 소나무, 단풍이 절 경을 이루는 ‘불영계곡’(명승 제6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건망증은 아이들의 특권이자 특기입니다. 불영사까지는 (지금도) 찻길이 끝나고 5리를 더 가야 하는데, 대단한 숲길이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에게도 신비롭게 다가왔을 만큼. 우리들은 조금 전 벼랑 끝의 공포를 까맣게 잊고 계곡의 여울물 소리보다 더 재잘거렸습니다.
올여름 동해안 여행길에 불영사를 들렀습니다. 숲길은 여전히 좋았습니다. 처음 봤을 때도 이미 죽어 있었지만 형체는 멀쩡했던 굴참나무(천연기념물 제157호, 1969년 지정 해제)는 이제 거의 다 썩어 그 루터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말이 연못이지 웅덩이보다 조금 더 컸던 연못은 크게 넓혀져 있었습니 다. 절의 서쪽을 감싸는 산등성이에 솟은 부처바위가 이 연못에 비친다 하여 절 이름을 불영사라고 했다는데, 까마득히 높아 보였던 그 부처바위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변한 만큼 절도 많이 변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내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송이버섯을 땄던 대웅전 뒤의 소 나무숲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 무상입니다.
651년(신라, 신덕여왕 5)에 이 절을 세운 의상 스님이 1,367년이 지난 지금 이 절에 다시 온다 해도 역시 무상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상감의 실체가 탐욕으로 비만해진 시대상이라면, 의상 스 님도 돌아설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은 숲길을 걸으며 미소 지을 것입니다. 숲의 ‘무상(無常)’은 ‘적멸상 (寂滅相)’이기 때문입니다.
“살 좀 빼시게!” 불영사 겨울 숲의 무정설법입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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