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곳이 성지라는 깨달음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평소에는 잊고 사는 거룩함과 일체가 되려는 욕구 때문에 이끌리는 곳이 성지
성속이분법은 종교 현상을 통해서 관찰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의식구조이다. 참됨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만큼이나 성과 속의 구별도 인간 의식의 기본적인 틀이다. 공간, 시간, 사물, 사건, 사람 등등 세상만사를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온갖 종교 현상이 전개된다.
성스러운 것은 한편으로는 기피의 대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묘하게도 끌림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성스러움에 대해 두려움과 이끌림이라는 상반된 정서적 반응을 한꺼번에 유발하는 장엄한 신비를 느낀다고 한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지적이 떠오른다. 일상의 범속한 생활공간과 구별되는 성스러운 의미가 부여되는 곳이 성지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아무 때나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되는 ‘위험’한 곳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범속한 현실 생활을 초월하는 거룩한 이상에 가치를 두는 종교적 심성의 입장에서는, 평소에는 잊고 사는 그 거룩함과 고밀도로 일체가 되려는 욕구 때문에 이끌리는 곳이 성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종교에서나 갖가지 연유로 성지가 지정되고 순례자들의 발길이 그리로 향하며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불교 외에 유력 종교들의 성지순례 실태를 대략 소개하며 특징을 짚어보기로 한다.
모든 무슬림이 기본 의무로 이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 신행 중 하나가 메카 순례
세계의 유력 종교들 중에서는 이슬람교가 특별히 성지순례를 중시한다. 이슬람에서 성지순례는 율법으로 정해진 필수 신행이다. 모든 무슬림이 기본 의무로 이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 신행, 즉 오행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메카 순례이다. 메카 순례는 개인적으로 행할 수도 있지만(“움라”라고 한다), 오행으로 인정되는 것은 이슬람력으로 마지막 달인 순례절에 이슬람 세계 전체가 참여하는 하즈(또는 핫즈, hajj)이다. 건강이나 경제적 사정으로 순례길에 나서기가 어려운 형편이 아닌 한 모든 무슬림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참가해야 한다.
메카는 무함마드의 출생지이고, 그가 돌산에서 방황하던 중에 천사로부터 알라의 계시를 전해 받은 곳인지라 당연히 이슬람 최고의 성지이다. 그러나 메카의 성스러움의 연유에 관한 이야기는 무함마드 훨씬 전으로 거슬러간다. 하즈는 그 시작과 끝이 카바에서의 예배인 만큼 메카 순례의 초점은 카바이다. 카바는 그 모양대로 “육면체”라는 의미인데, 이는 유태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공통으로 “신앙의 아버지”로 간주하는 아브라함이 지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아브라함이 천사로부터 받았다는 “검은 돌”이 안치되어 있다. 세상의 태초인 아담과 이브 때부터 이미 있었다는 설도 있다. 카바의 동쪽 모서리에 박혀 있고 외부에서 만질 수 있으며, 그것을 만져서 죄를 씻어내는 것이 성지순례의 한 절차이다.
또 하나 순례 코스에 포함되는 잠잠(zamzam) 우물은 아브라함과 하녀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이 모친과 함께 쫓겨나 방황하던 중 물이 없어 죽어갈 때 터져 나와 두 사람을 살린 샘이라고 하니 이 또한 무함마드 훨씬 이전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것이다. 그러한 내막을 살펴보면 메카 순례는 무함마드의 행적이 서린 이슬람교의 발생지로서뿐만 아니라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해온 태초의 성스러움과 이슬람교 사이의 연결을 확인하며 체감하는 행사라고 볼 수 있겠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예루살렘 비롯해
예수나 성모와 관련된 신기한 현상이 목도된 곳이 인기 순례지
다음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를 살펴본다. 그 두 기독교는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 종교계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슬람교와는 달리 성지순례를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신행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슬람처럼 율법으로 요구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성지순례에의 열정은 왕성하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입교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예비 신자 과정에 국내 성지순례 과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정해서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독려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두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지로 여기는 곳은 당연히 예수의 행적과 관련된 예루살렘 등지이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그밖에도 성인과 수도자들의 행적이 어린 곳들이 전통적인 순례지이고, 예수나 성모와 관련된 신기한 현상이 목도된 곳들이 새로운 성지로 부각되어 순례자들의 발길을 이끌어 들이곤 한다.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현재도 교황청이 위치한 로마 또한 인기 있는 순례지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순교와 관련된 곳을,
한국 개신교는 선교의 역사와 관련된 곳을 성지순례의 초점으로 삼아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순교와 관련이 있는 곳들이 성지의 대종을 차지한다. 교황청에 의해 시복(諡福, beatificatio) 내지 시성(諡聖, canonizatio)이 된 순교자들과 관련된 장소들이다. 그 밖에 신앙의 선조들의 활동과 관련된 사적지와 역사적 장소들도 교구의 직권으로 순례지로 선정할 수 있다. 근래에 서울대교구의 성지순례길이 교황청 승인을 받아 정식 국제 순례지로 등재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한강 백사장에서 참수형을 당한 양화대교 근처 절두산 순교 성지와 이촌동의 새남터 순교 성지가 있다.
한편 천주교처럼 순교의 역사를 겪지 않은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는 순교보다는 선교의 역사와 관련된 곳을 성지순례의 초점으로 삼는다. 근래에 출간된 성지순례 안내서에서 추천하는 순례길들을 보자면, 예를 들어 기독교 선교사와 단체들이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등을 세워 근대 의료와 교육을 태동시킨 신촌 일대라든가 “한국 최초로 성경이 전래되고,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의 발길이 머문 곳”으로서 보령과 서천 일대 등이 등재되어 있다. 또한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도 중요한 성지이다. 그런 사례들로 점철되어 있는 안내 책자의 내용을 훑어보면, 선교의 역사와 관련된 곳들이 한국 개신교 성지의 대종을 차지한다는 특징이 뚜렷이 나타난다.
한국 개신교 신자들의 해외 성지순례길로 각 교파의 고향 및 역사와 관련된 곳들이 꼽히기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교파별 교회와 선교의 역정이 성지순례의 초점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루터교회 신자들은 북유럽의 루터교회 국가들을, 장로회와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등은 영국을 성지순례 차원에서 여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
순례길에 나서는 것은 온몸의 지각과 감각을 열고
직접 그 앞에 서야만 체험되기 때문
요즘은 온갖 영상 매체가 세상 구석구석의 풍경을 담아서 우리 눈앞 화면에 펼쳐주기 때문에 직접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시각으로, 또는 청각으로 실감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영상으로 눈과 귀에 펼쳐지는 광경이 제아무리 실감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3D일 뿐이다. 영상을 통해 속속들이 낯익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직접 몸이 들어가야지만 비로소 4D로 체험된다. 바람이 살랑살랑 스치고 햇살이 따끈하고 현장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체험은 영상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가상현실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여행에서도 그렇거니와 성스러운 곳의 체험에서 그 차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실한 신자들이 굳이 즐겨 몸소 순례길에 나서는 것은 두려움의 전율과 이끌림의 매혹을 한꺼번에 일으키는 장엄한 신비는 온몸의 지각과 감각을 열고 직접 그 앞에 서야만 체험되기 때문이다.
시크교의 교주 구루 나나크(15~16세기)가 메카 순례길에 나서 사막에서 노숙하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두들겨 깨우기에 놀라 일어났다. 그 사람은 매우 화를 내며 나나크를 나무라는데, 나나크가 발을 뻗은 방향이 신성한 메카 쪽이라서 신성모독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나크가 대답했다. “그러면 신성하지 않은 방향으로, 신이 안 계신 쪽으로, 내 발을 좀 옮겨주오.” 아마 그 사람도 경지가 꽤나 만만치 않았던지, 나나크의 그 요청에 단박에 당황하며 난감해했다는 일화이다.
그런 차원에서는 어디는 성스럽고 어디는 범속하다고 나눌 것 없이 온 세상 모든 곳이 다 신성하고 거룩하다. 신은, 또는 정법은, 무소부재, 즉 없는 곳이 없이 어디나 두루 존재한다고 하는 차원이다.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어디에 가든 주인이 되고 어디에 있든 모두 그대로 참되다고 하는 것이 그런 경지이다. 일상의 모든 행보가 성지순례길이며 세상만사가 모두 신비이다.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 『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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