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무처럼 우주의 전 역사를 거듭 품고 있다|절집의 나무와 숲

나무가 알려주는
거듭나는 삶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인식은 어떤 한계 안에서 작동하기에
잣나무든 측백나무든 잘잘못 따지는 건 의미 없어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가져온 불법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자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태적으로 보면 조주 스님이 활동한 지역에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가 분포한다. 그래서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조주 스님의 절 마당 앞에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가 무성하다는 논거를 대기도 한다. 그런데 불법의 차원에서 보면 잣나무나 측백나무나 모두 우주를 연결하는 존재로 불법을 대표할 수 있으므로 잣나무가 맞는지 측백나무가 맞는지 이름을 따지는 것이 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인식은 어떤 한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차원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인식 한계는 무척 협소하다. 태양의 전자기파의 넓은 범위에서 우리는 아주 좁은 부분만 볼 수 있어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태양의 빛 전체라는 뜻에서 햇빛이라고 부른다. 물체를 이루는 원자의 공간은 허허벌판보다 더 넓은데 우리는 이들과 부딪치면 피가 난다. 더구나 이런 인식 한계가 나에 대한 욕심을 키우며 우리 몸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에 허망함이 느껴진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실…
500년생 나무라면 500년이 과거와 현재가 서로 되먹이며 늘 현실이 된 나무이다
이와 비슷한 잘못이 우리의 삶을 과거에 묶어놓고 과거의 기억으로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현실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진 가운데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과거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현실도 또 과거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처럼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늘 되먹이며 되살아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실이 된다.

500년 살아온 나무는 그 자리에서 과거-현재-미래를 잇고 있는 것이 아니라 500년을 품고 있는 오늘의 나무, 즉 오늘의 현실이다. 500년 전의 나이테를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500년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 과거를 잇는 것이 아니라 500년 동안 늘 현실의 영향을 받아서 다시 거듭난 나이테이다. 그 나이테의 세포는 처음 형성될 때의 관계에다가 500년 동안 우주의 전자기파를 받고 지구의 천둥 번개를 받아왔으며, 나무에서는 타닌 등 온갖 물질을 받아왔다. 그래서 줄기 속의 색깔이 바깥의 색깔보다 진하다. 즉 나무는 처음 자랄 때의 조건으로 영향을 주는 동시에 또한 500년 현실을 경험하면서 늘 새롭게 형성되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500년생 나무라고 하면 500년을 잇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500년을 나타내는, 즉 500년이 늘 과거와 현재가 서로 되먹이며 늘 현실이 된 나무이다. 과거가 저 뒤에 서 있지 않다. 오늘 새롭게 태어난 과거, 그리하여 과거이자 현실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 몸도 우주의 전 역사를 거듭 품고 있다
우리 몸을 살펴보자. 수소 원자가 최외각전자를 잃고 된 양이온(H+)은 우주 초기에 발생했는데 우리 몸의 대사 과정에서 혈액 등 체액의 pH를 결정하고, 생체막의 양성자(H+) 펌프를 통해 대사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혈액 속 철분은 우주 과정에서 초신성 폭발에서 유래했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무기물은 태양계를 이루어낸, 즉 먼저 태어났다가 죽음을 맞이한 별의 잔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우리 몸은 우주의 전 역사를 거듭 품고 있다.

우리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는 지구 생물 진화 초기에 나타난 원핵생물인데, 진핵세포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 감각 등 신경계통은 원시 동물이 발달시킨 감각 체계를 이어받았고, 각종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대부분 포유류의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물질을 이어받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지구의 생물 진화 역사를 거듭 품고 있다.

또한 우리가 꽃이나 열매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나 억새가 바람에 날리는 경치에 빠져드는 것은 600만~700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한 인류 진화의 초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고, 언어를 구사한 것은 인류 진화 과정에서 습득된 것이며, 추상적인 사고와 인문학 및 과학기술은 인류의 역사에서 발전된 것을 이어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인류 역사를 거듭 품고 있다.

즉 우리는 ‘우주에서 출발해, 지구의 생물 진화 과정을 체득하고, 인류의 역사를 거듭 경험하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어느 한 시작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우주와 생물 진화, 그리고 인류 역사를 모두 포함한 세계를 이어 나와 지금 여기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과정은 나무가 자라는 형상과 너무나 닮았다. 더구나 나무처럼 우주의 변화, 계절의 변화, 밤낮의 변화 어느 하나 우리와 따로 놀지 않는다.

가을이면 나무들이 잎을 지우며 고요해진다. 500년생 나무는 500년 동안 잎을 지우고, 100년생 나무는 100년 동안 잎을 지우며 세계를 가꾸고 있다. 우리는 평생 욕심을 비우며 살 수 있을까? 일편단심으로 내리는 낙엽은 ‘욕심을 비우고 세계를 가꾸어보자’라는 초대장이다.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며 맑은 하늘을 숲으로 불러들인다.

• 이번 호를 끝으로 <절집의 나무와 숲> 연재를 마칩니다.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