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초의 스님의 고절한 인격이 살아 있는
‘살림’의 도량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흥사에는 일 년에 두 번 단풍이 듭니다. 언젠가 이른 봄날 대흥사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갓 밝은 하늘 아래 펼쳐진 두륜산 자락은 붉었습니다. 단풍나무의 겨울눈이 살짝 부풀어 오를 무렵, 새싹들 의 붉은색은 아침 해의 맨 얼굴 같았습니다. 무수한 그 작은 얼굴들이 봄 햇살을 받아먹는 모습은 가 을 단풍과는 또 다른 장관이었습니다. 이런 산의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정한 이치겠지요.
대흥사 들머리는 장춘동(長春洞)입니다. 풀어 말하면 ‘긴 봄 골’이겠습니다. 그 골짜기를 구림구곡 (九林九曲)이라고도 하고 십리숲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아홉 번 굽이도는 숲길이니 봄이 길게 머물렀다 가는 것도 정한 이치겠지요. 봄에 좋은 곳이니 말할 것도 없이 가을에도 좋습니다. 겨울은 어떨까요. 역시 좋습니다. 숲의 적막 속에 피어난 동백꽃은 계절과 계절, 이승과 저승을 잇는 징검돌이 되어 생사일여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구림구곡이 다하면 대흥사의 도량이 열립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장 적멸의 세계입니다. 부도전입니다. 생사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입니다. 그 오의(奧義)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만, 가을 단풍의 붉음이 곧 다가올 앙상한 가지를 스치는 바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부도전에는 서산 스님을 비롯해 연담, 풍담, 초의 같은 조선 후기의 덕 높은 스님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서산 스님은 오늘의 대흥사를 있게 한 사실상의 중흥조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서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의발을 이곳 대흥사에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 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선교(禪敎)의 총본산으로 변모했습니다. 서산 스님의 문도 가운데 13대 종사와 13대 강백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들 스님 가운데 13대 종사인 초의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일지암’도 대흥사를 찾는 이들을 환희심으로 가득하게 할 곳입니다.
한국의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초의(草衣) 스님은, ‘풀로 옷을 삼는다’는 이름의 뜻에 딱 어울리는 초 옥에서 참선을 하고 차를 달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일지암(一枝庵)입니다. 나뭇가지 하나를 자신의 거처로 삼은 것이지요. 진정 천하를 집으로 삼을 만한 고절한 인격만이 살 수 있는 집이겠지요. 다시 봄이 오면 표충사에서 서산 스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일지암으로 가서 다향을 입에 머금고는, 산벚꽃 흩날리는 두륜산 기슭을 밟아 북미륵암의 바위 부처님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대흥사는 전각을 둘러본 것만으로 ‘절을 봤다’고 해서는 안 될 도량입니다. 인격의 향기와 자연의 무정설법을 들어야 할 곳입니다. 산벚꽃-신록-단풍-나목-동백꽃이 저마다 다른 모습의 하나요, 우리 삶 또한 그것들의 은혜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절입니다. 정녕 대흥사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된 ‘살림’의 집입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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