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밖에서 먹은 절밥 | 내 기억 속의 절밥

절 밖에서 먹은 절밥

박형권
시인


어머니는 불교 신자이다. 명산대찰을 찾아간 적은 없고, 집에서 가까운 작은 절에 자주 가는 것은 내가 보았다. 어머니가 절을 찾는 데는 대승적인 의미는 없고 단지 가족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정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 한 사람이 불교를 믿는 일은 가족의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종교와는 거리가 먼 아버지가 스님을 중이라고 부르다가 어느 순간부터 스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가 하면, 염주를 몸의 일부분처럼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학교 생활기록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는 ‘불교’로 기록되어 있었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강제적으로 절에 따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이름을 어느 절집의 기왓장 위에 적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처의 편이 아니었는지 사천왕상이 그렇게 무서웠다. 그 때문에 불교 전체가 두려웠다. 꼭 불교에만 그런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사촌누나를 따라 성당에 갔을 때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는 성당 벽이 그렇게 두려웠고, 친구를 따라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갔다가 온 세상의 모든 죄업이 자기 탓이라고 울부짖는 신자들을 보고 기가 질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종교와 친하지 않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어머니를 따라가면 내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인지 스님들의 설법이 지루했고 알록달록한 연등도 시들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섞여 먹는 절밥은 어찌 그리 맛나던지…. 도라지와 고사리와 취나물 같은, 내가 알고 있는 나물 외에 이름 모를 산나물이 들어간 그 비빔밥은 절집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말하는 그 절밥이란 템플스테이 같은 것을 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스님들이 먹는 토박한 음식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사부대중의 입맛을 감안해 절이 조금 양보한 것이 그런 맛을 냈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역사를 전공했는데 우리 역사에서 사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 사찰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봄가을에 가는 답사여행에서 사찰이 빠질 수 없었고, 방학에 학생들끼리 가는 답사여행에서도 사찰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이학년 여름, 청주에 사는 친구가 안내하기로 하고 10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공주 동학사에 가기로 했다. 여력이 있으면 갑사까지 돌아보고 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출발했는데 오후 3시경에 동학사에 도착했다. 답사 목적으로 거둔 회비는 전날 여관에서 술로 다 마셔버려서 우리는 쫄쫄 굶으며 동학사에 갔다. 동학사에 가서 가능하다면 밥을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막상 동학사에 도착하니 밥을 얻어먹겠다는 생각이 숨어버리고 없었다. 우리 중에 그렇게 주변머리가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주 사는 친구와 경내를 둘러보고 이름 모를 삼층석탑 앞에 섰는데 어릴 때 먹은 절밥 이야기를 할 정도로 배가 고팠다. 공교롭게도 그 석탑 앞에 불전함이 놓여 있었다. 시줏돈을 넣는 구멍이 손이 쑥 들어갈 정도로 컸다. 그때 나는 얼마나 교만했던가? 열 명이 밥 한 끼 사 먹을 돈만 꺼내가자는 생각을 했다. 내 입도 중요하지만 같이 온 답사 대원들의 입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니 그리 죄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손을 넣고 보니 부처님의 복장에 손을 집어넣은 듯한 죄책감이 따라왔다. 물론 배고픔이 먼저다 하는 생각도 함께 따라왔다. 결국 나와 답사 대원들의 배고픔을 구제하겠다는 명분이 앞섰다. 돈을 한 움큼 꺼내 세어보다가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았는데,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스님 한 분이 우리가 하는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표정은 무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보고 있긴 한데 보지 않는 것 같고 도로 넣어두어라 하는 것 같은데 가져가라 하는 것 같고, 삼층석탑처럼 무애했다. 스님이 우리를 향해 합장을 하는데 나는 합장하는 것을 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시내에 나온 우리는 그 돈으로 비빔밥을 한 그릇씩 사 먹었다. 모두 즐겁게 비빔밥을 먹었지만 나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절에서 가지고 온 돈으로 밥을 사 먹었으니 그게 절밥이긴 한데 그렇게 이상한 맛이 나는 절밥은 처음이었다. 모르긴 해도 불전함에 든 돈은 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그 배고픈 사람들의 밥을 내가 가로챈 것이었다. 그날 나는 오른쪽 발목이 몹시 쑤시고 아팠다. 나는 식당에 오기 전, 동학사에서 산길을 내려올 때 부처께서 ‘이놈 혼 좀 나봐라’ 하셨는지 오른쪽 발목을 삐었다. 한번 삔 발목은 평생 간다. 요즘도 발목을 삐면 꼭 오른쪽 발목을 삐게 된다. 그러면 절밥을 훔쳐 먹은 동학사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마다 ‘지금 나는 교만하지 않은가?’ 하고 나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다.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그런 절밥을 먹었다고 말했더니 어머니도 그 동학사의 스님처럼 무애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박형권
경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두커니』, 『전당포는 항구다』를 발표했으며, 『돼지 오월이』, 『웃음공장』 등의 장편 동화를 비롯해 『아버지의 알통』이라는 청소년 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달진 창원문학상, 한국안데르센상(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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