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가 지켜낸 신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정여울 작가의 책 읽기 세상 읽기

프로메테우스의 불씨,
그 마음의 극한은 어디일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刊, 2023년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우리 인류에 심어진
‘마음의 폭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로 제작되어 더욱 화제가 된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지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면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문명의 도구)을 주었지만, 인간은 그 불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인간을 살리기 위한 과학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과학이 정치의 시녀가 된다면, 정치가 과학을 권력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과학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천재적인 과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리더십으로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다. 맨하탄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기 위해 이루어진 미국의 핵무기 개발 사업이었다. 맨하탄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인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다음에야 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전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은 단지 원자폭탄의 발명을 이끈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전기가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우리 인류에 심어진 ‘마음의 폭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학의 지식과 정보를 전 세계에 투명하고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낸 과학자 오펜하이머
독일군과 일본군이라는 거대한 적들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해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성공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군비 경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핵무기 보유국’이 되기 위한 각국의 군사력 경쟁뿐 아니라 ‘과학자의 의견’은 무시한 채 과학을 정치의 도구로 삼는 권력자들이 늘어나면서 과학자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바로 그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영웅으로 추앙되었지만, 이후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그의 좌파적 성향과 인간관계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자폭탄이나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자 했다. 그가 최고의 자리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과학자들은 ‘국가나 권력에 도전하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매카시즘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학자들의 행보를 크게 위축시킨 것이었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상 탄압이 바로 매카시즘이었고, 매카시즘은 인류의 ‘마음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잔인한 트라우마를 남긴 것이었다.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사고하고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 자체를 위축시킨 셈이다.

학교나 연구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과학자들은 오직 ‘좁은 전문 분야’에서만 조언해주는 사람들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공동체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길, 그것이 그에게는 과학자로서의 길이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가 겨우 서른네 살의 나이에 무려 6,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끈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맨하탄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도 과연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폭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폭탄’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만이 핵보유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으며,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의 위험도 경고했다. 민간 핵발전소에 내재된 잠재된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했기에 그는 정치가들과 자본가들의 미움을 샀다. 그는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와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정신임을 강조했다. 바로 그런 그의 ‘열린 마음’이 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이었다. 나는 영화 <오펜하이머>와 함께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보면서, 오히려 ‘그가 성공하기까지의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뒤의 행보’임을 깨달았다. 오펜하이머는 수없이 굴욕당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과학의 지식과 정보를 전 세계에 투명하고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냈다. “우리는 비밀주의와 두려움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만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솔직함, 열린 마음, 서로를 향한 거짓 없는 소통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여울
KBS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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