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미얀마와 태국 불교|불교 발달사

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동남아시아 불교
미얀마와 태국 불교

등현 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 원장


◎ 미얀마 불교의 전래
황금의 땅(Suvanna Bhumi)으로 알려진 미얀마는,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이 9개국으로 보낸 전법사 중 소나와 웃따라가 처음으로 이곳에 불법을 전했다는 설과, 기원후 5세기 무렵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서 『청정도론』을 저술한 후, 인도에 돌아가는 중에 미얀마에 와서 전법했다는 설이 있다. 이 두 가지 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기원후 5세기 이전에 미얀마에 상좌부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미얀마 역시 다른 동남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도 대륙에 대승이 성행하는 2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대승불교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불교가 미얀마에 정식으로 정립된 것은 바간 왕국을 건국한 아나우라타(Anawrahta)왕(1044~1077년) 시기이다. 아나우라타왕은 여러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다양한 종파들을 상좌부 불교로 통합했다. 그는 미얀마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만든 후 다양한 민족의 통합을 위한 국가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선택했다. 이때부터 불교는 뒤를 이은 여러 왕조들의 지지와 보호 속에서 영국의 통치 시기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넓혀왔다.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의 불교
영국은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한 후, 소수 민족으로 다수 민족을 다스리는 정책을 활용했다. 이러한 정책은 영국이 떠난 후에, 통치한 나라들이 모두 분쟁에 휩싸이게 되는 비극을 가져왔다. 스리랑카에서는 소수 민족인 타밀인에게 싱할리인을 다스리게 했고, 그로 인해 해방 이후에, 싱할리인은 타밀 타이거 반군(LTTE)과 오랜 시간 내전을 치렀다. 미얀마에서도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1948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계 소수 민족인 로힝야(Rohingya)족을 고용해 미얀마인을 다스리게 했고, 로힝야족은 불교를 심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 오타마 스님을 중심으로 한 많은 미얀마 승려들이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YMBA)을 창설해 반영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사야산(Saya San)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때 영국군과 로힝야군은 승려와 불교도 1만 명 이상을 사살했다. 1948년 미얀마가 60여 년 만에 독립 정부를 세우고, 초대 수상으로 취임한 ‘우누’가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자마자 로힝야족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미얀마의 정치적 문제
이것이 바로 현재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로힝야’ 소수 민족과 불교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인종 갈등 문제의 발단이다. 미얀마 불교도가 유독 이 로힝야족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소수 종교의 반발로 인해 미얀마 정국이 다시 혼란해졌고, 1962년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승려들은 다시 학생들과 함께 네윈의 군사 독재에 피로써 항거했으며, 2007년에는 아웅산 수 치(Aung San Suu Kyi)를 앞장세운 10만 명 이상의 승려들이 강력한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미얀마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불교계를 존중하게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앞장서서 국난을 극복해온 스님들에 대한 신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한국의 호국 불교를 비판하지만, 정통 불교라 일컫는 미얀마도 또 다른 형태의 호국 불교를 실천하고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미얀마 불교의 특징
첫째, 팔리어 불교__미얀마와 태국,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남방불교의 강점은 팔리어 불교이다. 팔리어 삼장은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가져왔다. 팔리어는 남방불교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반면 북방불교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어 번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팔리어의 남방불교처럼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

둘째, 건축과 미술, 학문 분야를 망라한 불교의 영향__미얀마는 국토 전체가 거대한 불교 박물관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불교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미얀마에서 긴 역사와 전 국민의 89%가 신봉하는 국교에 가깝다. 문화 역시 불교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미얀마인의 생활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탁발 문화에서 오는 보시의 미덕과 상호 교류__지금 인도에는 탁발 공양 미풍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미얀마 불교에서 탁발 공양하는 승가 공동체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선 비구의 수가 50만 명이나 되다 보니, 미얀마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비구 스님과 사원을 만나게 될 정도로 민중의 삶 가까이에 있다. 그중 미얀마인의 생활과 가장 밀착된 의식 중 하나가 보시 문화이다. 아침마다 탁발하는 스님에게 공양물을 올리던 습관이 사회 전체로 퍼져서 국민의 90% 이상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런 스님이나 사찰에 대한 공양은 곧 사회적인 보시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얀마를 세계에서 기부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만들었다.

넷째, 국민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불교 의식과 가르침__미얀마인의 대다수가 실천하는 불교 의식 가운데 하나가 7~13세 사이의 아이를 사원으로 보내 승려 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단기 출가 의식이다.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와 함께 극기와 인내, 배려심 등을 체득하게 된다. 또한 미얀마인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관혼상제의 행사를 절에서 치르고, 국민의 교육 또한 일정 부분 사원에서 담당한다. 오랜 군사 독재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국민의 문맹률이 10% 이하인 이유는 사찰 교육이 한몫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경전 결집 국가로서의 자부심__경전 결집은 상좌부 삼장 전반에 대한 편집회의이다. 2,600년 불교 역사에서 성전의 편집회의인 결집은 여섯 차례가 공인된다. 제1차부터 제3차 결집까지는 남방과 북방이 공통으로 공인하고 있으나, 제4차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두 곳에서 열렸고, 이후 상좌부는 미얀마에서 제5차와 제6차 경전 결집 회의를 개최했다. 미얀마인은 여섯 번 중 두 번의 결집이 미얀마에서 열린 것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여섯째, 명상의 생활화__미얀마 불교의 또 다른 강점은 명상 수행이다. 기복적인 성향이 없진 않지만 승가나 재가 구분 없이 명상(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고, 외국인에게까지 개방하고 있어 서구는 물론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수천 명의 승가와 재가 불자가 미얀마에 와서 수행한다.

◎ 태국 불교와 계율에 대한 관점
태국 불교는 미얀마,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불교와 함께 남방 상좌부의 종가(宗家)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 불교가 800년간 잠을 자다가 이제 다시 깨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태국과 미얀마 불교는 이런 인도 불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좌부의 종가 역할과 기능을 해오고 있다. 태국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전파되었지만, 스리랑카에 다시 계맥(戒脈)을 전해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태국 불교 승가는 크게 두 파가 존재하는데 마하 니카야와 담마유티카 니카야이다. 마하 니카야는 다수파를 의미하는데, 태국에서 진보 성향의 승가를 말하고, 담마유티카 니카야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 비구의 계율 측면에서 보수 성향의 원칙주의를 고수한다. 반면에 마하 니카야는 세부적인 계율 조목에서 융통성이 있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오후 불식(午後不食) 시간에 마하 니카야는 우유를 마시는 것을 허용하지만, 담마유티카 니카야는 물과 차 이외에는 어떠한 음식도 허용하지 않는다. 탁발을 나갈 때에도 담마유티카 니카야는 맨발로 다니지만, 마하 니카야는 슬리퍼를 신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 보수 원리주의파는 와지라나노 비구(Vajirañāṇo Bhikkhu)에 의해서 1833년에 창설되었고, 후에 그는 라마 4세로서 제4대 왕인 몽꿋왕(재위 1851~1868)이 되었다. 이 보수 원리주의파를 창설하게 된 것은, 그가 한때 비구로 있을 때 무질서하고 타락한 승가의 생활을 목도한 경험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되어서도 불교계 정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남방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미얀마 불교와 태국 불교
미얀마 불교는 아비담마의 전승, 명상과 결집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스리랑카 불교는 남방 상좌부의 종주국으로서 경에 대한 정립과 영어 번역을 통해 불교의 세계화에 공헌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태국 불교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정립이란 부분에 대한 자부심으로, 상호 보완하면서 남방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등현 스님
1993년부터 20여 년간 스리랑카·인도·미얀마 등지에서 수행하면서 팔리어·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로 된 불교 원전을 공부했다. 이후 12개국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태국 국제불교대학(International Buddhist College)에서 3년간 강의했다. 현재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중앙승가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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