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은 불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허남결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챗GPT의 파급력이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미칠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를 일
얼마 전 외국 논문을 읽느라고 끙끙거리고 있던 나에게 어떤 학인 스님이 챗GPT의 번역 기능을 한번 사용해보라고 조언해줬다. 종이 사전만 고집하던 나는 솔직히 못 미더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도해본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놀라웠다. 문장의 맥락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 번역어의 선택도 그다지 나무랄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챗GPT의 능력 가운데 ‘번역’은 가장 기본적인 기능에 지나지 않을 텐데도, 이 정도의 만족도라면 개인이 사용할 개별 분야에서의 특화된 역할과 기능은 훨씬 더 다양하고 또 유익할 것으로 보였다.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기계가 인간의 고유 영역을 드디어 잠식하기 시작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어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픈AI사의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인 챗GPT의 충격이 일파만파다. 그것은 대화의 상대가 의식을 가진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튜링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했는가 하면,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음악, 영상 등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까지 그 적용 범위를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챗GPT는 사용법이 간단할 뿐만 아니라 요리법이나 운동 프로그램은 물론 웬만한 수준의 컴퓨터 코딩까지 마치 인간이 수행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성해준다. 한마디로 인간 친화적인 기술을 표방하고 있다. 이처럼 챗GPT는 일부 하이테크 기업들이 개발한 -인상적이지만 복잡한 기술보다- 일반 사업가를 비롯한 비전문가들이 사용하기에 더욱더 편리하고 실용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그 파급력이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미칠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과 불교윤리를 접목하려는 교학적 시도도 나타나
이런 시대 상황과 관련해 인공지능과 불교윤리를 접목하려는 교학적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태국 출라롱콘 대학의 소랏 헝라다롬(Soraj Hongladarom) 교수는 최근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윤리-불교, 인공지능과 로봇을 말하다』(2020)라는 책에서 인공지능 AI의 기능이 인간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공지능의 성격을 ‘자비로운 알고리즘(merciful algorithm)’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기술적 탁월성(technological excellence)’과 ‘윤리적 탁월성(ethical excellence)’을 두루 갖춘 ‘기계의 깨달음(machine enlightenment)’을 실현한 인공지능이다. 그는 불교의 ‘연민(悲, karuṇā)’ 개념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윤리적 실천에 지혜롭게 적용할 것을 주문한다. 인공지능이 자비로운 것이 되려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원력과 실천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불교적 의미의 자비로운 품성을 가질 때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인간 존재의 실질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는 불교 인공지능이 다른 유정물의 권리와 복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배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함을 뜻한다. 자비로운 인공지능은 그것을 둘러싼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인 ‘테크노쇼비니즘(technochauvinism)’과 ‘테크노포비즘(technophobism)’ 사이의 중도를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의 인간적 도전은
불교학계에도 신선한 충격이자 21세기적 화두
여기서 보듯이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달이 초래한 다양한 인간적 도전은 불교학계에도 신선한 충격과 함께 21세기적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소랏 헝라다롬 외에도 피터 D. 허쇽(Peter D. Hershock)은 이런 주제를 다룬 저서 『불교와 지적 기술:보다 인간적인 미래를 위하여(Buddhism and Intelligent Technology: Toward a More human Future)』(London: Bloomsbury Academic, 2021)에서 챗봇 등 인공지능 기술이 제기한 핵심적인 도전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라고 단호하게 성격 규정한 바 있다. 허쇽의 해법은 그가 ‘덕성 관계적 역학(virtuosic relational dynamics)’이라고 부르는 관념의 개발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런 인식과 사고는 책장을 넘길수록 “자비 관계적 덕성 윤리(an ethics of compassionate relational virtuosity)”에 관한 논의로 계속 확장, 체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서구적 개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사회를 비폭력적인 인드라망의 상호 의존 관계로 촘촘하게 엮으려는 불교윤리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허쇽은 불교야말로 지속 가능한 인공지능 윤리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과 수행법을 가장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허쇽이 전제하는 불교 인공지능 윤리는, 말하자면 지속 가능한 상호 관계적 공존의 윤리다. 이런 인식의 연장 선상에서 허쇽은 인공지능과 인간 존재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육바라밀의 자리이타적 평등 정신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되는” 것은 곧 우리가 “윤리적으로 되는 것”과 사실상 동격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의 권리와 프라이버시를 너무 강조하고 경쟁을 정당화하는 서구적 관념의 이기적 개인주의는 불교윤리적으로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이 그 중심에 있게 될 미래 사회에서는 불교 고유의 연기설에 바탕을 둔 관계적 불교윤리의 확립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연기의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원인과 결과의 패러다임에 바탕을 두고 세상의 실재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실상을 ‘자비로운 휴머니즘(compassionate humanism)’의 적용 대상으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와 자비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사바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념을 실제로 구현한 불교적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면 그것은 ‘과학’과 ‘영성’을 결합한 고통 치유형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것은 지혜를 갖춘 자비로운 인공지능이라는 뜻이다. 합리적인 사고와 자비로운 행동은 불교 인공지능의 가장 큰 덕목이 될 것으로 평가받는다. 과학과 영성은 지혜와 자비의 서구 버전에 해당한다. 지텐드라 우탐(Jitendra Uttam)은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자비로운 AI의 설계와 유통이 일어날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대한민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오랜 불교 전통과 빠른 인터넷망 및 과학기술의 수준을 고려할 때 그렇게 되는 것은 순리라고 예측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연기설에 바탕을 둔 지혜와 자비의 불교윤리가 각광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시공간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시대의 윤리로 거듭날 수 있는 종교적 유연성과 포괄성 및 탄력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붓다의 지혜를 가리켜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능동형’의 가르침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챗봇과 같은 인공지능이 지혜와 자비의 물로 끊임없이 자발적 관욕식을 치르는 가운데 불교 알고리즘의 -착상, 설계, 개발, 사용, 발전- 등이 이루어졌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인공지능 챗봇 기술은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윤리’ 같은 가르침과 계속 대화해야
불교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리고 오늘을 지나 내일도 변함없이 ‘인간과 기계와 그 외의 다른 모든 존재’와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인류 평화의 이념으로 끝까지 살아남지 않을까 싶다. 불교는 먼 옛날의 전설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서사이자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쉬지 않고 들려져야 할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미래도 불교의 미래도 계속 희망적이라는, 행복한 꿈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미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인공지능 챗봇 기술은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윤리’ 같은 가르침과 계속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럴 때야 비로소 챗봇을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을 파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과 미래를 담보해줄 휴머니즘 기반의 자비로운 기술로 거듭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인 불교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을 지향해야 할 챗봇은 서로 손을 맞잡고 대화해야 할 많은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더불어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이 기계와 다른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불교는 인공지능 챗봇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 인간의 변함없는 나침판이다.
허남결
동국대학교 국민윤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 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윤리와 공리주의의 접점 모색에 관심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가 있고, 번역서로는 『불교와 생명윤리학』, 『자비 결과주의』, 『불교응용윤리학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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