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에 대한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허남진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일상에서 정도를 지나쳐 소비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과소비를 경계하는 말은 아니지만 문맥상 비슷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씀으로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지나친 것보다 오히려 모자란 것이 낫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어쨌건 지나친 것을 경계하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우리 일상의 소비생활에서도 지나친 소비, 즉 과소비가 좋지 않다는 걸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소비를 경계하는 캠페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과한 소비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제시한 해탈의 길(道)도 괴로움과 번뇌(苦)의 원인이 되는 집착(集)을 깨뜨림(滅)의 과정이다. 과소비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상에서 정도를 지나쳐 소비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좀 끔찍한 말이지만 옛 속담 중에 ‘흉년에 어미는 굶어 죽고 아이는 체해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 엄청나게 먹어대는 과식 먹방이 유행하는 걸 보면 우리 유전자에 과식의 본능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 배고픔을 참고 아이는 배고픔의 기억 때문에 끝없이 먹어대는 게 아닐지. 과식을 부추기는 먹방도 먹을 게 있을 때 최대한 먹어두어야 한다는 먼 과거의 기억이 그 원인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경우의 과소비는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쉽게 극복될 수 있을 듯하다. 지나침과 모자람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이다. 먹방의 유행도 배고픈 시대에서 갑자기 풍요의 시대가 도래한 데서 온 일시적 혼란의 한 양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소비 억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따른 기준이 제시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
문제는 ‘과’와 부족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이다. 다시 공자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과유불급’ 구절 앞에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고 나름의 기준을 정해주고 있다. 자장과 자하를 잘 아는 다른 제자들은 이 말을 느낌으로 이해했겠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소비도 마찬가지이다. 과소비의 기준이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소득에 비해 소비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를 말한다. 소득의 범위를 넘어서는 절대적 과소비뿐만 아니라 소비가 소득을 넘어서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득에 비해 소비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도 과소비에 해당한다.” 경제학적으로 해석한 이 말이 개인적 소비의 경우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사회적 차원, 지구적 차원에서는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버리는 음식이 많으면 우리는 과소비라 비난한다. 아무리 부자 나라라도 자원을 마구 허비하면 과소비라 비난받는다.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 사회를 위해 환경을 잘 보존하자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버리고 에어컨을 끄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늘리면 건강에도 더 좋다지만 육류소비는 더 늘어가기만 한다.
소득과 소비에 대한 기준을 법으로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과소비 억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따른 기준이 제시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기준이 전혀 달라 더 어렵다. 나는 젊은 사람들의 종이와 물, 에너지 소비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50년 전에만 해도 화장지를 쓰는 집은 극히 드물었고 욕실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권장하는 목욕의 기준은 주 1회였다. 그러다 우리 사회가 갑자기 풍요해지면서 아침저녁 매일 2회 샤워는 기본이 되었고 화장지를 비롯한 종이는 거의 물 쓰듯 하는 시대가 되었다. 간혹 잘 아는 의사의 말을 인용해 비누칠을 너무 자주 하면 피부에 안 좋다고 충고하면 조선 시대 이야기냐고 되묻는다.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송도에 있는 모 대학의 최신 기숙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세 명이 쓰는 비좁은 방에 욕실이 두 개나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알았다. 아 나는 아직 옛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걸. 소비에 대한 이 시대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과소비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건 매우 어렵다. 있으니까 마구 쓸 게 아니라 환경을 생각하고 건강을 고려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무조건 과소비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 아래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를 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과유불급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과소비가 아닌 과학적 소비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허남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홍대용의 철학 사상」 등의 논문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