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경전이나 대승 경전, 선어록이 모두 중도로 통한다|특집, 무아와 참나

선종에서 무아와 참나

박희승
불교인재원 생활참선 지도교수,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사무총장


지혜의 눈을 갖추려면 중도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붓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탈하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 인류는 붓다의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한 대자유를 발견했다. 붓다와 그 제자들의 대자유를 향한 기록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방대한 말씀인 팔만대장경으로 결집되어 전한다.

하지만 붓다의 설법은 너무 방대해 공부에 어려움이 있다. 붓다의 팔만대장경에는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 그리고 조사어록이 결집되어 있는데, 워낙 방대하고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어 혼란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도, 연기, 무아와 참나, 주인공과 같은 말이다.

붓다는 깨친 뒤 첫 설법인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중도(中道)를 깨쳤노라” 했다. 중도는 곧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정견(正見)으로 시작하는 여덟 가지 바른길이다. 누구나 붓다가 깨친 중도를 공부해 정견을 세우면 해탈해 영원한 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정견이란 무엇인가?

붓다는 『가전연경』에서 정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다분히 ‘있다’와 ‘없다’에 의지하여 있느니라.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없음〔無〕’이 없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있음〔有〕’이 없다.

가전연아, 성제자는 이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한다.

가전연아, 이것이 정견이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눈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 만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中道)로 존재함을 알았다. ‘내가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으면 괴로움도 집착하거나 머물 것이 없으니 지혜(智慧)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혜의 눈을 갖추려면 중도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붓다는 이후에 중도를 팔정도, 연기, 무아, 사성제, 삼법인 등으로 다양하게 설명했는데, 이것은 모두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 뜻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붓다가 초기 경전에서 설한 불교의 정견은 중도이고 중도 정견이 바로 서면 지혜가 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초기 경전의 중도와 대승 경전의 반야, 공, 진여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 중도를 초기 경전에서는 주로 팔정도, 사성제, 무아(無我)로 설법했는데, 대승 경전에서는 반야(般若, 지혜), 공(空), 진여(眞如)라 했다. 대승 반야부를 대표하는 경전이 『금강경』으로 선종의 소의경전이거니와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이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사상(四相)이 없어야 한다고 설한다.

초기 경전의 무아를 대승에서는 더 세밀하게 사상(四相)이 없어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방대한 대승 경전에서는 무아를 무상(無相), 무념(無念), 반야(般若), 공(空), 진여(眞如), 연기(緣起), 불성(佛性), 자성(自性)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해 다소 혼란스럽다. 그러나 아무리 표현이 다양하더라도 붓다의 깨달음 중도를 중생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하게 설한 방편일 뿐 붓다의 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붓다의 깨달음은 중도를 근본으로 하는데 경전마다 표현은 다양하지만 뜻은 하나라고 동체이명(同體異名)이라 했다.

선종에서 무아와 참나 문제
7세기경 동아시아에서 출현한 선종(禪宗)은 참으로 독특한 견해이다. 인도의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전한 불법이 선종의 6조 조계 혜능(638~713) 대사에 이르러 『육조단경』이 정립되면서 선(禪)이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혜능은 문자를 몰랐지만, 『금강경』을 듣고 발심해 5조 홍인 문하로 출가해 방앗간 행자로 지내다 『금강경』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해 6조로 부촉되었다.

6조 혜능은 중국의 영남 조계산으로 가서 40년 동안 설법했는데, 조계산이 바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시원이 되는 성지이고, 혜능의 설법집이 바로 『육조단경』이다. 『육조단경』에는 붓다의 무아를 혜능 대사가 창의적으로 설하고 있다.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 선지식아, 깨달음을 만나면 지혜를 이루리라.”

혜능은 깨달음의 지혜는 본래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다만 마음이 미혹해 깨치지 못하니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자기 성품을 보면 깨달아 지혜를 밝힌다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지혜도 바로 붓다의 중도 정견을 말한다. 붓다가 초기 경전에서 말한 중도 정견을 혜능은 지혜라 말할 뿐이다. 선종도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혜능은 깨치고 첫 설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아라. 그럴 때 네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혜능 대사는 선과 악의 양변의 집착을 떠난 중도를 바로 보라 한다. 붓다나 혜능이나 같이 중도를 깨치고 설하는 것이다. 이 법문을 후대 간화선에 와서는 화두의 효시로 평해진다.

선종은 9세기에 임제(?~867)라는 걸출한 선사를 배출해 이후 임제 법맥이 동아시아에서 중심이 되었다. 한국 조계종도 임제 법맥이며, 일본 임제종도 그렇고, 베트남의 틱낫한도 임제 법맥이다.

임제는 붓다의 중도 정견을 철저히 세우고 실천하라는 법문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말했다. 참선 수행자는 무아의 진정 견해를 세우되 부처와 조사를 만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물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부처, 조사가 되라 강조한다. 이것은 붓다의 최후 유언,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자기 자신에 의지해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법등명 자등명’의 가르침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임제는 또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독특한 말을 했다. 조계종 종정 서옹(1912~2003) 스님은 이를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 하며, 참사람 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진인’, ‘참사람’이라 하니 선(禪)이 붓다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사람이 바로 깨달은 붓다를 말한다.

근세에 한국 선사들 중에 ‘참나’, ‘주인공’을 말해 일부 논란이 있다. 남방에서 초기 경전과 위빠사나 수행을 배워온 이들은 ‘참나’, ‘주인공’ 하는 것이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실재하는 진아(眞我)와 같은 외도의 견해라 비판한다. 일부 선사들이 참나, 주인공을 말하는 것은 붓다의 중도, 무아, 공을 중생의 근기에 맞게 방편으로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방편 설법이기는 하나 참나, 주인공을 말하는 것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아와 같은 뜻으로 오인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 성철, 고우 선사는 참나, 주인공 같은 말을 거의 쓰지 않았고, 오직 붓다가 설한 중도, 연기, 무아라 설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은 붓다가 깨친 무아를 화두로 바로 체험하고 실천하는 수행법이다. 화두선은 붓다가 깨친 중도의 마음을 언어 문자를 떠나 바로 자기 마음에서 체험하고 삶에서 행하는 수행법이다. 지식 정보가 넘쳐나고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화두 하나로 바로 마음의 평안과 지혜를 밝히는 참선법은 앞으로 더욱더 각광받을 것이다.

붓다가 깨친 무아의 마음은 말이나 사유 분별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오직 수행을 통해 체험하고 깨치고 행해야 한다. 여기에 불교의 수승한 지혜와 가치가 있다.

박희승
동국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조계종 총무원에서 20년 동안 종사하다 산중 선지식을 만나 간화선에 눈을 떴다. 지금은 불교인재원에서 생활 참선을 안내하며,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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