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라면 누가 수행하고 깨달으며 윤회하고 해탈하는가?

무아와 참나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무아라면 누가 수행하고 깨달으며 윤회하고 해탈하는가?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다. 그러나 무아 개념은 이해하기가 참 까다롭다. 우리가 워낙 무아에 근거해서 살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철저히 자아를 만사의 근본으로 여기는 습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취향과 판단과 언행이 나 자신, 자아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런 세계관에 무아설을 던지면 당연히 아리송함의 파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불교의 교설에 관한 공부가 진행될수록 두고두고 무아 개념의 아리송함이 재소환된다. 특히 수행, 깨달음, 윤회, 해탈 등으로 주제가 이어지면 반드시 제기되게 마련인 질문이 있다. “무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수행하고 누가 깨달으며 누가 윤회하고 누가 해탈한다는 것이냐?” 그 물음은 불교사상의 역사 속에서 되풀이해서 제기되었고, 여러 대덕들이 나름의 설명을 시도해왔다. 가히 불교 교설 이해의 주요 쟁점 중 하나라 할 만하다.

그런 의문에 대한 손쉬운 답변으로 흔히 쓰이는 것 하나가 가아와 진아의 구별이다. 우리가 평소에 자아라고 여기는 것은 가짜이건만 우리가 자아라고 착각할 뿐이니, 그 가짜 자아를 부인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게 하려고 무아를 설했다고 설명한다. 소아와 대아를 대칭시키는 개념도 흔히 동원되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으로의 회귀이다. 범아일여에서 “아”라고 번역된 아트만은 개체 생명체로서의 내가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늘 영원불멸인 주체이고 지각과 감각의 주체이며 인식 작용의 주재자이자 인식을 초월한 원리이다. 이를테면 개체 생명체로서의 자아의 이면에 있는 진정한 자아인데, 이를 발현해 우주 전체의 근본적인 원리인 브라만과 하나 되는 것이 궁극적인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무아 교설은 우파니샤드의 그 아트만 개념을 부인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에다가 가아/진아, 소아/대아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면 원천적으로 오류이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개념을 대놓고 쓰기도 하고, 그 밖에도 진짜 자아를 의미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고안하기도 했다. 언뜻 꼽아보아도 본각(本覺),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보리심(菩提心), 일심(一心) 등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들이 즐비하게 떠오른다. 선사들의 설법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인(眞人), 소소영영(昭昭靈靈) 등과 요즘에는 한국말 “참나”도 많이 쓰인다. 그런 개념들은 불변의 고정된 본질로서의 초월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듯하므로 근본 교설인 무아설과 배치된다는 지적도 종종 있다.

혼란은 무아 교설에 대한 관점의 각도 차이에서 비롯된 듯
그러한 혼란은 무아 교설에 대한 관점의 각도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특히 이를테면 인식론적인 반조의 맥락에서 나온 개념으로 보는 이해와 존재론적인 명제로 보고 접근하는 설명이 한데 엉켜서 아리송해졌다고 생각된다.

초기 경전에서 무아 교설은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로 표현되듯이, 석가모니가 구도 수행의 길에 나선 동기는 전적으로 인간의 운명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의 원인을 진단해내야 하겠는데, 이에 관한 교설이 무아이다.

우리는 감각기능과 지각 작용을 통한 인식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세상에 대한 관념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나의 자아가 주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감각과 지각, 인식의 어느 대목에도 영구 고정불변의 주재자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가르침이 무아설이다. 그저 감각 대상과 감각기관의 만남, 지각 작용의 프로세스, 그리고 거기에서 귀결되는 인식이 상호작용의 인과 연에 따라 연기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기실은 자아가 아니건만 모든 일의 중심과 주체가 자아라고 여기면서 허황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갈애를 일으킨다. 그리고는 그 갈애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바로 거기에 괴로움의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자신에게 영구불변의 본질적이고 독자적인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근거 없는 자아 관념(아상 我相)과 그 관념에 대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집착(아집 我執)을 떨치는 데 있다. 그래서 무아를 역설한다.

무아 교설은 일종의 인식론적 처방이자, 의문의 문맥에 따라 처방된 방편설
무아 교설은 원래 그처럼 인간 의식의 흐름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인식론적 처방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반드시 제기되는 의문이 있게 마련이니, “무아라면 누가 수행하고 누가 깨달으며 누가 윤회하고 누가 윤회로부터 해탈한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는 무아설의 인식론적 맥락과는 별도로 존재론적인 의미를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영구불변이며 불사불멸인 주체로서의 자아 개념은 부정되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겪고 수행을 하고 해탈을 지향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게 마련이다. 하나의 개체 생명체로서 태어나 삶을 꾸려나가는 우리는 워낙 태생적으로 아상과 아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무아로서’ 생각하고 살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도 아무튼 가르침에 따라 무아설을 받들고 아상과 아집을 떨치는 수행에 매진할 때, 그렇게 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되는 건가, ‘무아로서’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달리 말하자면, 나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젯거리인 “나”를 무엇으로 보아야 할지 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모든 개별 존재와 현상에 대해 독자적인 실체성을 부정하고 연기(緣起)로 만사를 설명하는 교설이라든가, 중도(中道)의 이치를 수행론을 넘어 존재론까지 확장하는 교설, 나아가 불성, 여래장, 일심, 본래면목, 참나 등등 앞에서 아트만을 연상케 하는 개념으로 언급한 교설들도 다 나름의 쓰임새가 있어서 구사된 방편설이겠다 싶다. 괴로움의 현실 속에서 그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수행에 임하는 한 생명체로서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요청됨에, 이런저런 의문의 문맥에 따라 처방된 방편설인 것이다.

딱 떨어지지 않는 아리송한 지점이 정진의 원동력
방편설에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효과가 중요하다. 효과를 볼 수 있다면 모순되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같은 질문에 대해 ‘예’와 ‘아니’를 다 말할 수 있다. 듣는 이에 맞추는 방편 교설은 현장성이 강하다. 그러고 보니 초기 경전들은 대개 특정의 시간, 공간에서 특정 청중의 특정 사안의 질문에 대해 말로 한 답변을 기록한 현장성이 강한 설법이다.

교설을 현장성, 즉 방편으로서의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서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고정된 개념과 관념으로 해독하려 할 때 희론에 빠지기 십상이다. 무아든 참나든 간에 그 개념의 일정한 의미를 찾아내 규정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하나의 뜻을 선택해 그것으로 “설명해버리는(explain away)” 순간 그 개념의 생명이 박탈될 수도 있다. 답을 찾아내서 설명을 해버리면 더 이상 현안이 아니게 된다.

종교에는 명쾌하게 설명을 해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닌 그런 사안들이 많다. 우리의 언설로는 어떤 하나의 고정된 정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는 사안들로 점철되는 것이 종교이다. 기존의 교설과 해설, 견해들을 다 모아놓으면 충돌, 모순, 역설 투성이인 그런 주제도 많다. 무아와 참나도 그러하다. 그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지점, 아리송한 지점이 오히려 종교적 탐색의 역동성을 자극하고 정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난달 『불교문화』에 게재된 글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서 반가웠다. “답 없는 물음표는 관찰자를 삼매로 이끈다. 답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매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래야 삼매에 이른다. 답이 있다면 답 나오는 순간에 삼매가 끊어지므로 선정에 다다를 수 없다. (…) 엄청나게 큰 물음을 품고, 그것에 죽도록 매달리는 삼매를 통해 관찰자가 물음표 자체가 되어야 선정을 얻어 번뇌가 끊어진다. 생로병사로부터의 자유가 여기서 얻어지는 것이다. (…) 이에 나는 가장 큰 물음표를 중생에게 던진 석가모니가 우리 인류사에서 제일 큰 치유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아픈가?’”(손영기, 「관찰자 스스로 물음표가 되라」, 『불교문화』 2023년 7월호, 84쪽).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 『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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