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고대 문화 예술의 살아 있는 박물관, 아잔타 석굴을 가다

아라한의 향기가 서린
아잔타 석굴


탑이 알을 상징한다면 석굴은 자궁을 모티프로 하는 듯하다. 알은 태양 아래서 생명력을 응축하지만, 자궁은 어둠 속에서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존재의 시원에 다가간다. 암반 속에 수평으로 파고들어간 석굴의 따스함과 어두움은 이러한 존재의 심원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의 공명은 태초의 진동과도 같이 심장을 울린다. 이번 동안거 해제 후 바로 떠난 인도 순례 중 석굴에서의 예불은 이러한 감동을 함께했던 순례객들에게 선사해주었다.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하지 않은 민무늬의 무불상 불탑이 모셔진 기원 전후의 석굴일수록 이러한 감동은 진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한 시점에 가까워서일까? 여기서 당대를 정진하다 가신 아라한들의 향기가 남아 있는 듯 느껴진 것이다.

인도 석굴 건축과 조각의 백미이자 아름다운 벽화들을 보존하고 있어서 보는 이에게 경외감을 일으키는 아잔타 석굴이 더욱 빛나는 것은 기원전의 투박한 무불상 석굴을 함께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0개의 석굴로 이루어진 아잔타 석굴
마하라슈트라주 북서부 레나푸르 마을의 숲속에서 천년의 잠에 빠져 있던 아잔타(Ajanta) 석굴은 총 30개의 석굴로 사타바하나 왕조(B.C.E.200~C.E.225)부터 7세기까지 조성되었다. 아잔타 석굴은 와고라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계곡의 절벽에 만들어졌는데, 둥근 포물선의 꼭짓점에 10굴을 필두로 좌우로 벌려가면서 6개 굴이 B.C.E. 2세기경부터 조성되었다. 이것이 전기(前期) 굴(1기 굴)이다.

이 최초 굴인 10굴이 1819년 영국군 존 스미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후 74년이 흐른 뒤 퍼어슨이 조사, 발굴하면서 아잔타 석굴은 세상에 알려졌고,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잔타는 ‘인적이 드문’이라는 뜻이다.

전기 굴이 만들어지고는 300년 이상 중단되었다가 24개 굴이 더 조성되었다. 이를 후기 굴이라 한다. 후기 굴은 5세기 굽타 왕조 때 9개의 굴(2기 굴), 7세기 전후에 다시 나머지 14개 굴(3기 굴)이 만들어졌다. 30굴은 최근 추가되었다. 후기 굴 역시 전기 굴에 붙여 좌우로 확장하면서 조성되었다.
굴의 중앙탑

인도 석굴은 법당굴과 승원굴로 분류된다. 아잔타도 마찬가지다. 법당굴(chaitya)이라고 하는데, 예배 전용 공간으로 승방이 없다. 예배 대상인 탑을 모시고, 탑 안쪽이 둥근 장방형의 앱스형 평면이며, 천장이 승원굴보다 두 배 이상 높은 돔형 구조이다.

승원굴(vihar)은 스님들이 거처하고 정진하는 굴로 천장이 낮고 평면이다. 승방 위주의 공간이므로 석굴 내부의 기둥 뒤로 보이는 양쪽 벽면에 승방들이 있다. 입구의 맞은편 벽에는 벽 중간을 뚫고 공간을 만들어 감실을 조성하고 불상을 모셨다. 불상을 돌아 나올 수 있도록 감실의 불상 뒤로 굴을 뚫어놓은 곳도 있다.

아잔타의 법당굴은 9, 10, 19, 26, 29굴인데, 9, 10굴은 기원전의 굴이며, 19, 26굴은 후기 굴이다. 29굴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승원굴은 나머지 25개이다. 건축과 조각의 아름다움은 법당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굴은 소박미와 화려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26굴은 6세기 초 아찰라 스님이 조성했다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석굴 안 불상 위의 7층 일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현장 스님은 옛 노인들의 말을 빌려 “아라한의 원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거나 신통력에 의한 것이거나 약술의 공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부 벽면을 채우고 있는 부조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성과를 증득하시려는 성스러운 징조와 적멸에 드시려는 신령스러운 감응 등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부조 양식으로 새겨놓았다”고 쓰고 있다.
특히 26굴의 입구 쪽 왼쪽 벽면에 조성된 거대한 열반상은 그 상호가 그윽하기 이를 데가 없어 부처님의 대자비와 열반의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아잔타 석굴의 아름다운 벽화
벽화의 아름다움은 승원굴에 있다. 1, 2, 16, 17굴이 대표적인 벽화굴이다. 아잔타에 그려진 벽화는 불화, 부처님 일대기, 본생담, 아바다나로 분류된다.

남아 있는 총 75개의 작품 중 불화가 17점(22.7%), 부처님 일대기가 14점(18.7%), 본생담이 39점(52%), 아바다나가 5점(6.7%)이다. 본생담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작품 수로는 39점이지만 본생담 편수로는 25편이다. 1굴에 7점, 2굴에 5점, 16굴에 6점, 17굴에 21점이 남아 있다. 17굴은 거의 모든 벽화가 본생담이어서 부처님의 수많은 분신이 환생한 듯하고, 색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까지 겹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 벽화는 부처님 일대기의 비중이 압도적이고 본생담이 적었던 기원 전후의 산치 탑문의 부조와 비교하면 정반대이다. 부처님 가신 지가 오래될수록 부처님의 일대기는 격감하고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본생담이 기원후 5세기경에 더욱 유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응하고, 부처님의 전생 보살이 보살 사상의 원류인 점과도 관련 있다. 또 산치 탑문에 부조된 육아상본생, 대원본생, 용왕본생, 사마본생, 베산타라본생의 다섯 작품은 아잔타 벽화에도 그대로 그려져서 일찍부터 유행했던 것임을 알게 한다.

아잔타 석굴은 인도 고대 문화 예술의 살아 있는 박물관
아잔타 벽화의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화이다. 아잔타 벽화의 백미로 꼽히는 것이 1굴의 연화수보살도이다. 연화수보살도의 표정, 눈빛, 그 시선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온 중생의 고된 삶을 연민해 마지않는 대비(大悲)의 모습 그 자체이다.

16굴에는 죽어가는 공주 그림이 순례객들의 마음을 잡는다. 난다 왕자가 출가해서 삭발하는 장면의 왼쪽에 약혼녀 자나파다칼라야니 공주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장면이다. 힘없이 의자에 늘어진 몸과 진한 슬픔이 가득한 얼굴! 등불이 사그라들 듯 생명력이 꺼져가는 한 여인의 모습이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시중드는 여인의 표정도, 공주의 머리 위 천장에 목을 길게 빼고 엎드린 공작도 공주의 절망에 부응하고 있다.

육신통 중에 타심통이 있다. 자신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다른 이의 마음도 비쳐지는 것일까? 아잔타의 회화와 조각은 생동감과 감정 표현의 현실감이 도드라진다. 여기에 자애와 연민, 선행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덧붙여져 작품마다 감흥을 일으키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이 아름다운 석굴은 인도 고대 문화 예술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글과 사진|각전 스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39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다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출가했다. 현재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저서에 『인도 네팔 순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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