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명법문 | 생명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성철 스님의
구도자의 질문

「1982년 음 6월 30일, 방장 대중 법어」 중에서

성철 스님(1912~1993)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일체 만법이 본래 불생불멸이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고 감(去來)이 없고, 생명도 또한 거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에서도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이요,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고 하였고, 법화에서도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 하였는데, 이 적멸상(寂滅相)은 생멸이 끊어진 불변상(不變相)을 말합니다. 이 불생불멸을 진여, 법계, 연기, 실상, 법성, 유식, 유심 등 천명만호(千名萬號)로 이름 하나 그 내용은 다 동일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불타의 대각(大覺) 자체여서 일체 불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난해하여 불타의 혜안(慧眼)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치 못하였으며, 이 불생불멸은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현대 과학에서도 원자물리학으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하여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3,000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였고, 과학은 3,000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하여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相通)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불타의 혜안이 탁월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 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입니다. 이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여서 유정무정(有情無情)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무정의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 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멸 거래가 없습니다. 무정 생명론은 너무 비약적인 것 같으나 유정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무정도 항상 활동하고 있으니, 예를 들면, 무정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스핀(Spin)을 가져 항상 자동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도 간단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억의 살아 있는 석가가
취하여 춘풍 끝에 춤추는도다.
백억활석가(百億活釋迦) 취무춘풍단(醉舞春風端)

진정한 의미의 인간 회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구족한 절대적 존재이니 이것을 ‘본래시불’이라 합니다. 이 본래시불을 중생으로 착각하여 중생이라 가칭하며 중생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이 망견을 버리고 본래시불 인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회복입니다. ‘진금’을 ‘황토’로 착각하였으나 활연히 각성하여 진금임을 확인하면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또한 면경(面鏡)과도 같습니다. 본래 청정한 면경이 일시적으로 때가 끼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나 그 때만 닦아버리면 청정한 그 면경이 그대로 드러나서 일체를 비출 것이니 다른 면경을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면목, 즉 심경(心鏡)을 덮은 때와 먼지를 상세하게 규명하여 그 진애(塵埃)가 티끌만치도 없도록 철저히 제거함을 인간회복의 본령(本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경을 덮고 있는 이 진애인 망견을 추중(麤重)과 미세(微細)로 양분하여 추중은 제6식, 즉 현재 의식이며, 미세는 제8식, 즉 무의식(無意識)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제거하면 자연 통명(洞明)하여 진불인 본래면목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면경을 부수고 오너라
푸른 하늘도 또한 몽둥이 맞아야 하는도다.
타파경래(打破鏡來) 청천야수끽봉(靑天也須喫棒)

종교 안에서 인간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종교를 일반적으로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으로, 상대(相對)에서 절대(絶對)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유한이 즉 무한이며 상대가 절대임을 주장합니다. 반면 일반 종교는 현실 외에 절대를 따로 세워서 자기가 생존하는 현실 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 무한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이 즉 절대여서 인간이 절대 무한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절대 세계를 다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를 ‘상대’로 착각하는 망견만 버리면 삼라만상 전체가 절대이며 일체가 본래 스스로 해탈하니 불교의 진리는 인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하늘 높이 밝게 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눈을 감고서는 “어둡다, 어둡다”고 소리치면 눈뜬 사람이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다 한탄하지 말고 눈만 뜨면 자기가 본래 대광명(大光明)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다만 눈을 가린 망견만 버리면 자연히 눈을 뜨고 광명이 본래 충만해 있었음을 볼 것이니, 눈만 뜨면 인간이 본래 절대 광명 속의 대해탈인(大解脫人)임을 알 것입니다.

부처도 또한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떤 것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불야견부득(佛也見不得) 운하명중생(云何名衆生)

● 이 법문은 『성철 스님 법문집-자기를 바로 봅시다』(퇴옹 성철 저, 장경각 刊, 2014년)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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