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감정의 뇌과학』 | 정여울 작가의 책 읽기 세상 읽기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 아닙니다

『감정의 뇌과학』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장혜인 옮김, 까치 刊, 2022

감정을 무조건 통제하라고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 것이다. 하지만 태양열을 저장해두었다가 전기로 바꾸어 활용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일단 저장해두었다가 좋은 기회가 있을 때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감정을 지금 표출하지 않고 잠시 저장해두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까. 절실함, 분노, 안타까움, 온갖 억울함을 모으고 또 모아 언젠가 커다란 미션을 수행해야 할 때 한꺼번에 폭발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감정의 뇌과학』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연구를 토대로 해 ‘감정’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그 결과 그는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감정이 이성처럼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음을 밝혀낸다. 얼마나 반가운 책인가. 우리의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소중한 내적 자산일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으니.

이성은 자료와 목표를 바탕으로 논리적 결론을 끌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면, 감정은 우리가 목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주어진 자료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이성의 힘만으로는 결론을 끌어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럴 때 아무리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일지라도, 지나치게 복잡한 상황이나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감정의 힘’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감정과 마주하지 않으면 자신과도 마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내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섣불리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매일 아침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를 선택하는 작은 일로부터 인생의 행로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커다란 일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우리를 따라다니는 중요한 요소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감정을 섬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단지 비논리적이고 비생산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우리는 감정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감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적으로는 내 감정을 한 올 한 올 명확히 느끼고, 그 감정의 스펙트럼을 기억하고 해석할 줄 아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감정 표현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 감정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함부로 표현하지 않는 것도 어른스러움의 징표일 것이다.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안전한 이유는, 이미 표현된 감정을 실제로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의 절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 남몰래 오랫동안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을 고백하는 것, 자신이 잘못한 일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이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 이런 중요한 일들은 반드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야만 해낼 수 있는 인생의 과업들이다.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것’과 ‘감정을 지혜롭게 표현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감정의 강물을 마치 댐처럼 잘 가두어두었다가, 적절한 순간에 방류해주는 지혜일 수 있다.

오늘 당신을 괴롭힌 일이 있다면,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힌 일이 있다면, 그 감정을 당장 표출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글’로 기록해두자. 기억해둔 그 감정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마치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 듯 오랫동안 쌓아두자. 당신에게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할 때, 당신의 인생을 바꿀 만한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그 노트를 읽고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마침내 그 커다란 미션을 완수해내기를. 그러려면 평소에 늘 내가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내 감정의 주인이 되자, 아주 사소한 감정조차 소중히 여기자, 그동안 하찮게 여겼던 모든 감정들이 오히려 눈부신 글쓰기의 재료가 되었다. 나는 내 희로애락의 감정이야말로 눈부신 이야기의 보물창고임을 깨닫게 되었다. 고흐나 베토벤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이야말로 창작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우리도 감정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기를. 감정의 노예가 되기를 멈추고,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지혜로운 감정 표현과 동시에 독창적인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여울
작가, KBS제1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저서로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문학이 필요한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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