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에 대해 | 사유와 성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에 대해

제이 L. 가필드
스미스 칼리지 철학과 석좌교수, 본지 편집위원


6.1
여래에게 올린 공양과 보시
몇 천 겁 쌓아온
그 모든 덕행이
단 한 차례 성냄으로써 무너진다.

6.2
분노와 같이 해로운 죄악도 없고
인내와 같이 유익한 고행도 없다.
그러니 인내를 여러 방법으로
부지런히 수습(修習)해야 한다.

6.3
분노의 가시가 심장을 찌르면
마음은 평안에 이르지 못하며
행복과 기쁨도 얻지 못한다.
잠은 달아나며 힘도 역시 쇠한다.
- 샨띠데바의 『입행보리론』 中

많은 사람들은 흔히 화(嗔)를 내는 것이 정당하며, 심지어는 불가피하다고도 믿는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화를 낼 만하다고 여기며, 정의롭지 못한 상황 혹은 타인이 해를 입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화를 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도 믿는다. 그런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가 억압받고 부상당한 이들을 배신해 그 악행에 가담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피해자들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존중의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샨띠데바와 같은 불교 철학자들이 화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것을 두고,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수동적일 것을 혹은 무관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우선 화가 왜 그토록 파괴적이고, 인내는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이해해보도록 하자. 그런 연후에 우리는 악행에 대한 적절한 불교적 대응이 무엇인지, 화를 내지 않고도 이를 인지하고 바로잡을 방법은 없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화는 최소한 네 가지 이유에서 병적이다:
1) 화는 우리의 판단을 흐려, 우리로 하여금 덜 능률적인 주체가 되게끔 한다.
2) 화는 우리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불쾌한 것이다.
3) 화는 그 화를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4) 화는 책임과 자유에 관한 우리의 잘못된 견해를 반영한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최근에 화가 많이 났던 때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그때 명확하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유했는가? 당신이 행동한 방식에 대해 떳떳한가? 당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이루었는가? 혹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가? 아마 이 중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화는 특히 우리의 공격성을 비롯한 각종 감정을 격앙시키며, 한 발짝 물러서서 반성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화를 야기한 그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하는 대신, 나중에 후회할 만한 어리석은 언행을 저지르도록 만든다. 우리의 화를 조절하고, 명확하게 사유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다면, 화가 많이 났던 그때를 계속 생각해보라. 화난 것이 즐거웠는가?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은가? 다른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던가? 흥분함으로써 당신의 사회적 관계가 개선되었는가? 혹은 그것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실망한 주변 사람에게도 불쾌한 경험이었는가?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 경우이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 화나기를 선택하지 않으며, 그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화는 우리로 하여금 남들 눈에 흉해 보이게끔 만들고, 친구와 가족, 동료와의 관계를 무너뜨린다.

당신이 화가 났을 때, 화를 야기한 문제 상황을 그 화가 해결해주었는가? 혹은 더욱 악화시켰는가? 나는 후자였으리라 추측한다. 우리는 해악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이 화는 다시 우리가 더 많은 해악을 일으키게끔 한다. 어쩌면 우리는 첫 번째 해악이 이를 정당화시킨다고 생각하거나, 그저 생각 없이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 한들 위해(危害)는 해소되지 않으며, 해악, 화, 응징의 순환이 반복되고 증식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제도가 ‘자유롭게’ 행동했으리라고, 즉 원인 없이 작용했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확히 인지한 채 해를 끼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여긴다.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보이기 위해 샨띠데바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그가 묻기를, 누군가가 당신을 막대기로 때렸을 때, 당신은 무엇에 화가 나는가? 막대기? 팔? 혹은 사람? 어쩌면 사람한테 화가 난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막대기는 팔이 움직이고, 팔은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에 의해서라면, 당신은 그 사람의 의도에 화를 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 역시 그 사람의 믿음, 지각, 기분, 자라난 배경 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므로 당신은 그것들에 화를 내야지, 그 사람에 대해 화를 내선 안 될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화내기에 적합한 대상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몇몇 행동이 원인을 갖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인이 없는 행동은 없다.

화라는 감정은 파괴적이며,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없다. 화는 자신의 무지와 자제력의 부족을 드러내며, 능률적인 도덕적 주체, 친구, 동료가 되기 어렵게 만든다.

화의 해독제는 인내이다. 인내는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그저 반사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적절히 반응하도록 이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의 해로움을 덜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고, 또 상황을 능숙히 개선하는 데에 관심을 보다 집중하게 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연습이 필요하나 분명 유의미한 실천이다.

인내는 비단 타인에 대한 인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길러내기 어려운, 자기 자신에 대한 인내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제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여기며, 스스로의 행동과 반응에 대해 타인보다 더 엄격하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이는 우울증 내지 지나친 자책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역시 연기(緣起)적이며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한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자책하기보다는 그 원인과 조건을 바꾸고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일구는 데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다. 정말로 해로운 행동과 제도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진정한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화보다는 의분(義憤)으로, 즉 진지하고 완강하며 타당한 비판과 저항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는 언제나 화를 내는 것보다 효과적인데, 우리를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능률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폭력과 억압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의 행동은 이를 결정하는 조건과 원인의 결과라는 점, 그리고 그것들이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스로 능률적인 비평가이자 변호인으로서 능숙하게 대응해야 한다. 화는 우리가 그 순간에 주어진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나약함의 표시이며, 인내는 반대로 강인함에 대한 증거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번역|조연우·권건우

제이 L. 가필드(Jay L. Garfield)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스미스 칼리지 철학과 석좌교수로 있다. 이 외에도 하버드 신학대학원 불교철학 객원교수, 멜버른 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도 고등티베트연구 중앙연구소(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 철학과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Knowing Illusion: Bringing a Tibetan Debate into Contemporary Discourse』, 『Buddhist Ethics: A Philosophical Explora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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