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지혜 | 2023년 캠페인 ‘단순하게 살자(미니멀 라이프)’

본지는 2023년 상반기 6개월간 “단순하게 살자(미니멀 라이프)”를 주제로 캠페인을 진행하며 릴레이 칼럼을 싣는다.

풀의 지혜

정순백
전남대학교 강사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의 화려한 가을의 때깔이 마냥 부러울 만큼 곱고도 고왔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보니 앙상한 나뭇가지에 겨울이 내려앉아 어느새 꽁꽁 똬리를 틀고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의 길목이 우리의 친숙한 시계(時計)를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서둘러 떠나버린 가을의 아쉬움과 서운함은 못내 여울을 그려놓았다. 여울의 그 흔적은 기어코 쓸쓸함과 덧없음으로 변신 중이다. 왠지 휑해진 가슴이 시리다.

애초에 계획하고 기대하며 겨울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만큼 실상은 겨울이 쓸쓸할 이유도 없다. 겨울의 눈부신 순백의 아름다움이 가을의 때깔을 온전히 발가벗지 않고서 애당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디 그뿐이랴? 이듬해 봄의 자리는? 차가움을 모른다면 속살 같은 봄바람이 반갑기나 할 일인가? 봄의 따스한 새로움은 어디에 자리를 잡을 것이며, 새로움의 결실인 여름의 풍성함은 또 어디에 담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자연은 늘 스스로를 내려놓고 비움으로써 새로움의 풍요를 해마다 나르는 듯하다. 욕망(désir)을 가득 채우려는 욕심을 멀리하고 자신의 필요불가결한 욕구(besoin)로서의 필요에 귀 기울이는 태도!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든 덜어냄이 없이 한없이 축적하려고만 한다. 욕심을 부려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주체이다. 게다가 그 소유와 소비를 위해선 사람을 제치고 돈이 주된 자리를 꿰고서 주인 노릇을 한다. 즐거운 삶과 행복을 위해 소유와 소비의 주체로서 ‘나’ 자신이 진짜 필요로 하는 욕구와 욕망의 크기와 내용, 달리 말하면 ‘나의 삶’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는 ‘나’도 ‘나의 삶’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소유하고 소비하는 주체가 모델로서 아름다울 뿐이다.

그렇다. 후기 자본주의가 마련해 우리에게 제시한 삶의 즐거움과 행복의 기준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선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라”는 기준은 이제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준칙이 되었다. 거기에 힘없는 이웃과 말 없는 자연이 받을 상처와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뿐 아니라 내가 ‘나’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나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기준 정립은 이제 사회의 준칙에 위배되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후기 자본주의 사회만의 부속물은 아니었나 보다. 일찍이 루소는 『에밀과 교육에 관하여』라는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지금도 해마다 벌어지는 베네치아 사육제 가면을 언급하며 밝힌 바 있다. 루소는 그곳에서 어른들이 진정한 자신이 되어 자기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 준칙의 노리개’로만 살다 떠나는 한스러움이 그가 교육론을 쓰게 된 궁극적인 동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18세기 철학자 루소의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우리가 ‘사회 준칙의 노리개’로만 살다 간다는 루소의 지적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에서도 그렇게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는 각자에게 다음처럼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듯싶다.

사회가 제시한 행복하고 잘 산다는 삶의 기준에 맞추어 살 때, 나는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한가? 근면 성실하게 살면서 많은 소유와 소비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늘 외롭고 풍요 속의 빈곤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가? 과연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준칙은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필요충분조건인가? 자문해볼 일이다.

또 한편으로, 사회가 요청하는 이해(利害)와 지위와 평판과 유복함과 편안함을 따르며, 본래의 ‘나’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혹시 아직 진정한 ‘나’와 ‘나 자신이 되어 사는 법’을 모르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 중은 아닌가? 멀쩡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늘 허기진 욕망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요컨대 ‘나’의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점철된 욕망의 대상에 사로잡힌 눈은 오로지 소유의 대상에 속박될 뿐, 존재의 풍요로움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만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의 눈치 보며 허상과 망상에 흔들리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라는 단 한 번뿐일 삶의 절규에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 오고 가는 법칙, 빈손과 맨발로 말이다. 자연은 다 내려놓고 비움으로써 사계절의 각각의 새로움을 나른다. 어쩌면 인간도 알몸으로 자연의 한가운데 서서 과잉의 소유와 소비의 욕망을 비우고서야 저 무등(無等) 세상의 무진장(無盡藏)한 풍요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린 듯 강한 자연의 순리는 내가 ‘나’가 되어 ‘나의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저 겨울의 비우기를 통해 보여준다. 때에 따라 모든 걸 내려놓고서 새싹을 품어 틔우는 본래의 마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휘둘리지 않고 당당할 ‘나’와 ‘나의 삶’은 물론 가난해 그윽한 존재로서 저 원융(圓融)한 평등성지(平等性智)의 세상이 펼쳐지리라!

오늘도 간절히 외치고 있는 자연의 침묵은 흐른다.

정순백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라뤼엘(F. Laruelle)의 비-철학을 동양의 중도사유와 함께 연구하고 있다, 현재 전남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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