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왜 행복해질까?

숲과 인간의 생존 프로젝트


식물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피운다

남효창
(사)숲연구소 이사장


움직이는 생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에게 의존적이다
컴퓨터를 끄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들려오는 것이 있다.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다람쥐의 바스락대는 소리 그리고 나무가 내쉬는 숨소리까지 몸에 전해진다. 과학 문명이 대신할 수 없는 절대 고요가 온순한 영혼을 되찾아준다. 마치 가상의 세계처럼 자연의 실제 세계가 펼쳐진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보고 듣고 반응하는 존재자란 사실을 일깨운다.

냉이와 꽃다지가 살았던 한 뙈기의 땅에 망초와 개망초가 점령을 하더니 이제는 달맞이꽃, 강아지풀, 개똥쑥과 나리 종류의 꽃들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나는 달맞이꽃과 나리꽃과 코스모스들이 만발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 한 뙈기의 땅이 담고 있는 이야기책들을 읽어보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찬란한 봄날을 수놓았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얀색과 노란색 꽃잎 색깔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유에서 봄에만 피는 꽃, 여름에만 피는 꽃, 가을에만 피는 꽃들이 생겨났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면, 나비와 벌들과 같은 곤충들이 특정한 시기를 풍미하며 살아가고, 왜 그때그때 새들의 출현이 다른지 뚜렷하게 알게 된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움직이는 생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에게 의존적인 존재이다. 나는 자연이 가꾸어놓은 한 뙈기의 땅을 보면서 코스모스에 담긴 우주로의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놀라운 초능력을 갖고 있다
식물들이 긴 세월 동안 멸종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잠시 잠깐 봄날을 향유하고 떠나는 봄꽃들은 자신을 뽐낼 수 있는 낮의 길이가 봄날의 낮의 길이와 일치한다는 사실 말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식물들은 절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천재들이다. 이들이 절기를 놓치는 순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다. 절기의 길이를 아주 정밀하게 읽어내기 때문에 어느 봄날의 특정한 날에 우리는 봄꽃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여름꽃을, 가을에는 가을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달맞이꽃, 칡꽃, 능소화, 자귀나무꽃을 봄에 볼 수 없는 것이며, 꽃다지나 냉이를 가을에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어느 한 일정한 장소에서, 어느 한 특정한 절기에 묶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생존에 위협을 받는 일일까?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날씨를 생각하면 그들의 삶은 고행의 연속이 아닐까? 식물들 삶의 어려운 점은 이뿐이 아니다. 호시탐탐 잎을 갉아먹고 몸통까지도 파먹는 생물들을 피해 멀리 달아날 수도 없는 처지의 생물이 식물 아닌가? 자신의 그러한 특징 때문에 변덕스러운 날씨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잎을 갉아먹는 생물들에 대한 방어적인 전술과 구체적인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 생물이 식물이기도 하다. 움직이는 생물들이 갖지 못한 놀라운 초능력을 갖고 있는 생물이 식물이기도 하다.

식물의 잎이 초록색인 이유, 꽃잎의 색이 다채로운 이유
지독한 봄철 가뭄에,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식물들은 수분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강한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는 물질을 스스로 생산해내는 능력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잎이나 몸통을 갉아먹지 못하게 타닌이나 플라보노이드를 생산해서 자신의 가해자가 곤충인 경우에는 애벌레 단계에서 더 이상 탈피를 못하게 만들어버리거나, 때로는 불임을 시켜 더 이상 종족을 번식 못하게 만들고, 때로는 잎을 갉아먹은 곤충들을 지속적인 춘곤증 증세를 보이게 해서 죽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에게 잘 알려진 버드나무가 생산하는 아스피린(aspirin)이나 양귀비가 생산하는 아편(opium), 자작나무가 생산하는 자일리톨(xylitol), 담뱃잎에서 생산되는 니코틴(nicotine), 커피나무 열매에서 생산되는 카페인(caffeine) 등은 자신을 지키는 대표적인 방어 물질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이러한 식물의 방어 물질을 유익하게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대표적인 생물군에 속한다. 물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모든 움직이는 생물을 적대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반드시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식물의 잎은 왜 초록색이고 꽃잎의 색은 다채로울까? 이유는 간단하다. 빛의 성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잎은 초록 빛깔을 반사하고, 꽃잎의 색깔은 그 색깔을 반사하기에 그렇다. 흰색 꽃잎은 꽃잎에 닿는 모든 가시광선의 빛깔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빛깔은 초록색이다. 그래서인지 움직이는 동물은 초록색에 현혹되는 경우가 드물다. 반면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 나비, 벌, 새는 빛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한 동물의 성향은 화려한 꽃잎을 만들어내는 식물이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꽃잎이 화려한 색상을 띠는 것처럼 화려한 빛깔로 몸치장하는 동물도 있다. 식물에게서 학습한 것이 아닐까? 꽃잎 색이 화려한 이유와 꽃 속에서 발산되는 향기는 다른 생물과의 소통의 신호 체계이다. 이렇게 식물의 다양한 기술 개발 덕택에 식물을 찾아오는 생물과 비로소 공진화(coevolution)가 가동이 된다. 식물의 이러한 눈부신 화학 산업의 발달은 자신의 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큰 결함이 가져다준 선물이 아닐까? 세상은 애초부터 생물에게 친절하거나 자비롭지 않은데 시련과 고통 다음엔 환희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식물은 빛깔과 향기로 에둘러 표현한다.

바람은 나무에게 / 태양은 나무에게 / 나무에게 대지는 /
단 한 번도 너그러운 순간을 / 약속한 일 없다.
자비로움을 / 나무는 스스로 익힌다 / 나무의 삶이다.

지구의 모든 것은 화학 원소들뿐이다. 지구의 몸통이 그렇고, 바다와 강의 물이 그렇고, 높은 산을 이루는 바윗돌이 그렇고, 그곳에 깃들어 사는 나무나 모든 생물이 그렇다. 화학 원소의 집합체이다. 식물은 동물과 다르지만, 그 시작은 다 같은 화학 원소이다. 단지 원소를 받아들여 합성을 달리하고, 원소의 배열을 다르게 했을 뿐이다. 식물은 원소를 받아들여 섬유질이란 견고한 물질을 만들어낸 반면, 동물은 조각조각 난 작은 뼈를 연결해 자신의 몸을 지탱하게 된다. 생물의 기본 단위는 세포이다. 동물의 세포가 둥굴다면, 식물의 세포는 사각에 가깝다. 둥근 모양의 세포는 아주 유연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각의 세포는 막을 다시 감싸는 딱딱한 벽이 추가로 발달해 있다. 식물의 섬유질이며 세포벽을 이룬다. 이런 세포들이 대략 60조 개가 모여 하나의 생명체로 활동하는 생물이 우리 인간이다. 벽이 없는 막으로만 된 세포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자재로 움직이거나 굽힐 수 있는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식물 세포는 견고하고 딱딱한 벽이 있는 세포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굽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나무처럼 말이다. 에너지 효율성면에서 식물은 운동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검소하다. 한번 정해진 장소를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은 동물과 삶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추위와 더위를 피해 동물은 쉽게 이동하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을 공격하는 강한 동물을 피해 약자인 동물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작은 꽃 속에 있는 세상의 진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한해살이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자신의 꽃을 피워야 하고 씨를 생산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알맞은 절기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해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그것에 맞추어 꽃을 피운다. 봄꽃이 생기고, 여름 꽃이 생기고, 가을꽃이 피게 된다. 물론 서양민들레처럼 모든 계절을 다 이용해서 살아가는 식물도 있지만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식물이 놓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기에. 아무리 자신을 흔들어도 식물은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흔하디흔한 간단한 물과 이산화탄소 분자로 모든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식물이야말로 연금술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식물을 만날 때마다 나는 왜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까? 식물은 주저함 없이 속삭인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피운다고. 가만히 보고, 자세히 보고, 정밀하게 보라고. 하나의 작은 꽃 속에 세상의 진리가 앉아 있다고.

잎을 갉아먹는 애벌레도
훨훨 나는 어른이 되면
천년을 살아갈 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찾는 노래꾼들도
열매만 달랑 먹어치우지 않고
숲을 일구는 노래를 부른다.

모두 함께 묶여서 자라는 곳
숲이란다. 세상이란다.

서로 다른 빛깔들이
더불어 묶여 피는 곳.
세상이란다. 숲이란다.

저마다 색깔과 향기와 모양과 크기가 다른 이유는

숲이고 싶고, 세상이고 싶어서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여 산단다.

잠시만이라도 문명을 내려놓고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경청할 수만 있다면, 마음의 가난함은 잊힐 것 같다.

남효창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을 전공했다. 동 대학 산림환경정책연구소 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석사(1994년)와 박사(1998년)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는 (사)숲연구소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이 땅에 숲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환경부 환경교육자문위원, 세계생명문화포럼 추진위원, 생태 체험 교육전문지 『애벌레』 발행인, 한국휴양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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