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 | 송담 대선사 법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

송담 대선사 법문


옛날 큰 병(甁) 속에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 새가 어느 날 꾸벅꾸벅 졸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참으로 예쁜 여자아이로 태어나 좋은 집안에서 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느덧 자라서 절세미인이 되었고, 일등 신랑감을 골라 결혼을 했는데, 그 신랑 또한 훌륭한 대장부로 높은 벼슬을 해서 그녀는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임금 또한 그 신랑을 총애해 그의 말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보니 간신(奸臣)들이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녀의 남편은 역적 모함을 당해 귀양살이를 갔고 급기야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들도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멸족당하고 자신도 어느 관가에 종으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게 되어 결국 그녀의 집안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녀 또한 밤낮없이 남편과 자식 생각만 하다가 원한에 사무쳐 큰 병(病)이 나서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죽을 때 숨이 딱 끊기자 다시 눈을 떠보니 병 속에 들어 있는 새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람이 되어 결혼해서 신랑이 정승이 되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 한낱 병 속에서 한 마리의 새가 꾼 꿈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사실 ‘하나의 병(甁)’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육도법계를 하나의 병(甁)이라 생각한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한 마리 새는 천당을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또 인간으로 혹은 축생으로 혹은 아귀(餓鬼)나 수라(修羅)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도의 좋은 곳에 태어나 즐거움을 받고 나쁜 곳에 태어나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국 생사윤회하는 한 마리의 새에 지나지 못하고, ‘업의 불[業火]’에 섶을 집어넣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대도를 성취하신 후, 다음과 같이 설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괴로우니라.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이 없느니라. 몸뚱이를 받아서 태어나는 것도 고(苦)요, 늙어가는 것도 고(苦)요, 병드는 것도 고(苦)요, 죽어가는 것도 고(苦)니라.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은 없느니라.”

중생들은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 결국 고통의 덩어리에 지나지 못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해 그것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속 업을 지어가고 있으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망하고 무상하며 전체가 괴로운 것뿐이라고 맨 먼저 우리에게 설해주신 것입니다.

그럼, 왜 괴로운가? 그것은 모든 것들에 대해, 즉 자기 육체, 자기 재산, 자기 명예와 권리 등에 애착(愛着)과 집착(執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려면 도(道)를 닦아야 합니다. 여러 방편의 도 가운데 최상승의 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이 참선법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빠른 요긴한 길입니다.

시비일침몽(是非一枕夢) 옳고 그름 한 베개의 꿈과 같고,
취산일시정(聚散一時情) 모였다 흩어짐 한때의 정이로다.
안분심휴헐(安分心休歇) 자기 분을 알아서 마음을 쉰다면,
인간대장부(人間大丈夫) 그것이야말로 인간 가운데 참다운 대장부라 할 것이다.

네가 옳고 내가 그르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나 국가 모두 옳고 그른 시비가 있는데, 이 모든 시비가 다 한 베개의 꿈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이 인연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때의 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생에 부모 자식 간에 인연, 또 부부간의 인연이라 하면 참으로 지중(至重)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인연들은 일시(一時)의 정(情)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생, 저 전생, 수억만 생이 있어왔기에 금생에 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고, 처자와 권속으로 만났지만 전생의 일은 이미 잊어버려 알 수 없고, 자못 금생에 이렇게 만나서 잠시 50, 60년 내지 60, 70년을 같이 산다 해도 인생이라는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문에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와 만남의 인연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애정과 인정을 중시해 ‘참 그 사람이 정답다 정이 있다’, ‘그 사람은 무정하다 매정하다’ 하고, 또한 자식을 키울 때도 정에 너무 빠져 자식을 키우는데 사실 그것은 업(業)을 두텁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마음을 쉬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되고, 자기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하므로 그 정을 돌이켜서 지혜와 자비로 승화시켜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의 분(分)을 아는 것이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각을 생사심이라 부릅니다. 번뇌, 망상이니 이렇게도 말하지만 ‘생사심’이라 표현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왜 생사심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가? 이 생사심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한 생각이 일어나서 이리저리 가지를 뻗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립니다. 이 한 생각이 일어날 때, 혹 좋은 쪽으로 발전해나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혹 나쁜 쪽으로 발전해나가면 공연히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또 그 생각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지면 또 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하기를 하루에도 수천수만 번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우리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미래의 생사윤회의 씨앗으로 심어집니다. 그 종자가 이 시간 이후에 적당한 인(因)과 연(緣)을 만나면 거기서 새로운 생사윤회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을 설하시면 그중 하나가 ‘중생계가 다할 날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육도법계가 밤낮으로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수가 천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생사윤회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생사윤회는 오직 우리를 괴롭히기만 합니다.
결국 생사심을 어떻게 하면 깨뜨려 생사 없는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바로 우리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 생사심을 깨뜨리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일분일초도 쉴사이 없이 우리를 핍박하며 쫓아올 것이고, 사방팔방에서 방편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노려, 우리에게 이 생사윤회를 끝낼 기약은 영원히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 생각을 도(道)에 나아가는 첫걸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한 생각은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 절대 잠시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훨훨 타는 불구덩이 속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하면 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불도, 나의 몸과 목숨도 돌아보지 말고, 누군가가 구해줄 것이라 바라지 말고, 집, 자식 등 모든 생각을 할 것 없이 무조건 밖을 향해서 내닫는 것입니다. 사방천지가 온통 불이지만 타 죽는 셈치고 불도 보지 말고 밖을 향해 나간다면 잠시 불에 몸이 닿는 순간 뜨거울 수 있지만 번개같이 뛰어나가면 그 사람은 결국 살아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참선해나가는 사람은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정진해야 생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송담 대선사의 1985년 6월 용화선원 하안거 결제 법회 법문을 편집부에서 녹취,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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