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개산 석대암과 심원사 | 한국의 기도처, 지장성지 순례

지장보살 진신이
항상 머물며 설법하는 곳

보개산 석대암과 심원사


황금빛 돼지로 나투신 지장보살님
신라인과 고려인은 이 땅이 불국토라고 믿었다. 불보살님들이 항상 머무신다는 자부심은 금강산에 법기보살, 오대산에 문수보살, 보개산에 지장보살이 살고 계신다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보개산은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에 걸쳐 있었다. 1963년 철원군의 일부가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3개의 시군을 품어 안은 산이 되었다. 연천군과 포천시 쪽 보개산의 최고봉이 지장봉(877m)이다. 옛 이름은 환희봉이다. 지장보살의 가피와 영험이 널리 알려지면서 지장봉이 되었다. 포천시에서는 보개산을 아예 지장산으로 명명했다.

신라의 명사수 이순석 형제는 보개산에서 황금빛 멧돼지를 보곤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피 흘리며 환희봉 쪽으로 달아난 멧돼지를 찾아간 곳엔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은 지장보살 석상이 샘물 안에 묻혀 있었다. 화살을 뺄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살생을 일삼던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함을 보이셨으니, 내일 만약 샘에서 나와 앉아계신다면 출가해 도를 닦겠노라’고 맹세했다. 이튿날 다시 와 보니 지장보살상은 샘에서 나와 계셨다. 이들은 지난 삶을 참회하며 출가했다. 720년에 300명을 이끌고 암자를 세웠는데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정진했기에 석대암이라 불렀다. 고려 후기의 문인 민지가 쓴 「보개산 석대기」에 전하는 창건담이다. 민지 역시 석대암에서 방광을 체험했다. 창건 이래 석대암 지장보살 관련 영험담은 차고 넘친다. 누구도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그저 단순한 ‘돌 보살상’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다.
석대암의 지장보살

심원사의 지장보살석상

원심원사 지장전의 지장보살

연천 심원사를 대신해 법등을 이어간 철원 심원사
신라 영원 스님이 647년에 흥림사를 세운 것이 보개산 심원사의 첫 역사다. 이후 절은 여러 번 소실되었다. 무학대사가 중창하면서 심원사로 이름을 바꿨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중건되었고, 1907년 일본군이 불을 놓아 또 소실되었다. 1931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해방 직후 삼팔선으로 북한 땅에 편입되었으며 스님들의 남하로 퇴락했다. 한국전쟁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휴전 직후 군사보호지역이 되며 일반인의 출입마저 통제되었다. 참배할 수 없는 심원사를 대신해 스님들은 1955년, 산 너머 철원읍으로 자리를 옮겨 심원사 현판을 달았다. 법등을 이어가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 석대암 지장보살상은 서울의 한 무속인에게 넘어갔다. 철원 심원사 스님들은 기나긴 재판을 통해 1959년, 다시 지장보살상을 모셔 왔다. 스님들이 서울에서 철원까지 보살님을 업고 이운했는데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이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석대암 석조 지장보살을 모셔 오면서부터 ‘살아 있는[生] 지장보살 도량’의 명성은 철원 심원사로 옮겨왔다. 옛 심원사 터에 남아 있던 자재로 명주전을 지었다. 어둠 속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어두울 명(冥) 자의 명부전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지닌 밝은 구슬을 상징하는 밝을 명(明) 자의 명주전 이름이 각별하다.

고려의 이색은 보살상 크기가 ‘3척’이라 했다. 민지는 ‘왼쪽 어깨에 1촌가량 옆으로 금이 가 있는데 화살이 꽂힌 흔적’이라고 했다. 명주전에서 뵙는 지장보살상은 옛글 그대로다. 자그마한 돌 지장보살상은 친근한 미소가 압권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두건은 어깨까지 내려오고 오른손을 살포시 가슴에 대고 있다. 배꼽 쪽으로 내린 왼손에는 여의보주가 들려 있다. 민지가 말한 ‘저절로 색이 변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보여준다는 구슬이다.
석대암 지장보살을 모신 심원사의 명주전 현판. 지장보살이 지닌 밝은 구슬을 상징해 명주전이다.

원심원사 입구의 부도군

명산의 정기 깃든 지장봉 아래 원심원사와 석대암
철원으로 심원사를 옮겨놓고도 심원사 스님들은 옛 절터를 복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번다한 소송 끝에 1997년, 국유지로 변한 옛 심원사 터 826만 4,462m2(250만 평)를 되찾았다. 철원 심원사와 구분되게, 원래의 심원사라는 의미로 ‘원(元)심원사’라 이름했다. 원심원사는 발굴 조사를 통해 2004년부터 복원을 시작, 과거의 사격을 되찾는 중이다. 단아하게 지어진 지장전에는 석대암의 옛 지장보살상 이미지를 닮은 돌 지장보살님이 새롭게 모셔져 있다.

석대암도 2009년에 다시 산문을 열었다. 원심원사에서부터 2km 구간을 올라가야 한다. 매월당 김시습도 ‘덩굴 쥐고 절벽 잡아’가며 석대암에 올랐다. 1시간 30분 남짓한 거리다. 깊고 깊은 보개산 전경을 발아래에 두고 유리로 지어진 석대암 가건물에는 480m 규모의 대형 청동 지장보살상을 모셨다. 옛 지장보살상의 이미지를 차용했지만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서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대암에 가면 창건기에 등장하는 샘물을 만나야 한다. 산언덕에는 기단과 분리된 채 놓인 ‘보개산 지장영험비’도 있다. 풍우에 씻겨서 글자를 전혀 알아볼 수 없지만 다행히 탁본이 전한다.

걸음걸음을 닮고 싶은 보개산의 선지식들
파란 많은 역사를 지나는 동안 사찰이 전소될 때마다 보개산 스님들은 다시 빈 땅에서 복원 불사를 이뤄내셨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오직 지극한 ‘한 생각’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잃어버린 절 땅을 되찾고, 잃어버린 보살상을 되찾아오셨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보개산의 사암 중흥 불사에 진력하셨을 스님들의 그 원력을 생각해본다.

말년을 심원사에서 수행 정진한 경헌 스님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구한말, 심원사 스님들은 300여 항일 의병들에게 숙식을 비롯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성불을 향해 치열하게 정진하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두 소매를 걷고 앞장서셨던 보개산 큰스님들의 발걸음은 지장보살을 닮았다. 육도를 윤회하며 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원력을 세운 분이 지장보살이 아니던가. 철원 심원사를 거쳐 산 너머 연천 원심원사와 석대암을 순례하는 동안 우리는 대체 어떤 원력으로 기도하며 정진해야 할지 무겁게 돌아볼 일이다.

글|이윤수
방송작가. 문화 콘텐츠 전공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연등회의 역사와 문화콘텐츠』가 있다.
사진|하지권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