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명상적 평정심 | 명상과 고통

고통과 명상적 평정심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 니액 연구 교수


불교의 행복론과 고통 : 평정심의 행복
행복에 관한 최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대략 두 가지 조건 아래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조건은 긍정적 감정의 확대이다. 긍정적 감정을 갖는 것은 행복감을 느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리학자들은 다양한 조사를 통해 긍정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해 삶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을 더 많이 갖는다고 보고한다. 또 긍정적 감정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고 자신의 능력을 다양하게 확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들을 조사한 연구가 있었다. 이 졸업 사진에서 긍정적인 정서를 많이 표현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수십 년 후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행복감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이러한 긍정적 정서의 지속에 있다는 것이 이러한 연구의 결과였다.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성취와 실현의 과정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한 가지 방법은 의미 있는 자기 계발과 발전에 있다는 것이 이 입장이다. 자신이 즐기는 일에 몰입하거나 혹은 의미 있고 보람찬 일에 정진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자기 성취’의 행복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은 정신(Eudaimonia, 유다이모니아, 좋은 영혼 또는 좋은 마음: 유[eu, 좋은], 다이몬[daimon, 신성한 영혼의 내적 능력])’의 삶 혹은 자기 성장과 덕(德)의 삶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유다이모니즘(eudaimonism) 또는 자기성장주의 혹은 자기실현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는 행복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에는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심리적 문제나 결여만을 주로 연구한 기존의 심리학 접근법을 벗어나서 긍정적인 자기 발전의 심리를 연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심리학의 학파)이라는 학파가 있는데 이 두 가지 행복에 관한 생각들은 바로 긍정심리학이 주장하는 행복론을 대변하는 생각들이다. 간략히 긍정심리학의 행복에 관한 연구를 요약한다면 그것은 행복은 긍정적인 정서 상태를 갖거나 자신의 능력을 성공적으로 의미 있게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반드시 행복이 이기적 자기 발전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의미 있는 자기 계발은 타인을 위한 봉사나 사회적 활동도 포함한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거나 타인에게 감사의 감정을 갖는 것은 행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최근 행복 연구에서 드러났다.

심리학에서 발전된 이러한 행복 연구는 따라서 행복의 두 가지 중요한 기반을 보여준다. 긍정심리학은 즐거운 마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이 행복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론은 불교의 고통에 관한 가르침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먼저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정서와 마음 자세를 가지라는 것은 인생에 관한 불교의 기본적 시각인 고통과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러한 긍정심리학과 불교의 대조적 입장은 불교가 긍정적인 정서를 나쁘게 보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심리학에서 고통의 의미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대조적 상황이다.

고통과 연기적(緣起的) 조건 아래에 있는 불교적 삶은 단지 긍정적 마음을 가지라는 (즉 긍정적 정서를 가지라는) 주장을 글자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스스로를 계발시켜가라는 주장도 역시 불교의 무아(실체적 자아가 없음)에 관한 주장과 사뭇 다른 주장이다.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집착이 되기 쉽고 결국 이러한 과도한 자기 위주의 삶은 불교적인 깨달음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건전한 관심은 의미 있는 정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기 위주의 시각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긍정심리학이 주는 긍정의 시각으로 본다면 불교는 행복을 포기하는 혹은 행복이 퇴출된 종교가 되고 만다. 불교는 행복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종교이니 이런 대조적 상황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불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행복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적 행복론은 그 자체가 모순이거나 언어도단이라고 할 만도 하다. 누리는 삶 혹은 성공적 삶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이 불교의 정신이다.

하지만 올바른 삶 혹은 좋은 삶에 관한 불교적 논의는 언제나 가능하다. 행복에 관해서는 긍정심리학과 불교의 대조적인 시각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입장에서 행복을 논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행복을 쾌락이나 긍정적 감정이라는 좁은 범주로 제한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좋은 삶 혹은 바람직한 삶이라 가정하면 불교에서도 당연히 좋은 삶에 관한 생각을 개진할 수 있다고 본다. 좋은 삶이란 보통 사람이 ‘잘’ 사는 방식을 의미한다. 보통 사람은 해탈을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일 수 있고 해탈 과정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보통 사람에게 불교가 줄 수 있는 행복론은 무엇이 있을까? 긍정심리학이나 심리학의 다른 이론들이 발전시킨 것과는 다른 좋은 삶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불교가 줄 수 있을까?

불교가 줄 수 있는 좋은 삶에 관한 생각은 바로 앞서 논의한 명상의 진통 작용과 관련이 있다. 명상은 바로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진통 효과가 있다. 명상은 고통을 부정하고 단순히 즐거운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살려고 하는 순간 항상 고통이라는 것은 따라다닌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태어나는 것, 늙어가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사망하는 것 이 모든 삶의 과정이 모두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완화시키고 삶을 담담히 잘 살아가게 해주는 방법도 있다.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있는 우리 삶을 어루만져주는 행복의 가능성이 불교에는 있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해 적극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내적인 평정(tranquility)을 찾는 고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행복관이다. (이러한 평정의 상태는 편견에 빠지지 않는 마음의 균형적 상태[아타락시아, ataraxia]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과도한 혼란 상태가 없는 것[아파테이아, apatheia] 등으로 설명된다.) 적극적인 활동이나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내적인 균형을 잡는 고요함, 차분함, 담담함의 행복이 아마 명상을 통해 불교가 주는 행복관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긍정적 감정이나 자신의 능력을 의미 있게 확대하는 것과 같은 긍정심리학의 행복 모델이 아니지만 그와 대조되는 다른 방식의 행복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이 고유함의 행복의 조건을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덕(德)의 굳건한 상태나 편견 없는 지성의 논리적 사고에서 찾았다면 불교적인 고요함은 명상의 상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명상적 고요함은 바로 명상의 진통 효과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신경과학은 이러한 불교적 명상의 고요한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앞서 이미 논의한 바처럼 두뇌 영상술은 명상의 진통 작용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뇌 영상술로 드러난 명상의 진통 작용은 두뇌에서 지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들의 활동을 가라앉히고 직접 느껴지는 감정과 감각을 담당하는 두뇌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작용이다. 이 특정한 감정과 감각이란 바로 담담한 마음으로 고통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감정과 감각이다. 다시 말해 고통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명상의 집중된 고요함이 바로 불교적 행복(좋은 삶)의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긍정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적 상태와 연결되는 긍정적 정서의 상태도 아니고 의미 있는 자기 발전의 과정과도 다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스토아적인 지적 이해의 과정도 아니다. 이것은 두뇌의 변연계와 부변연계의 특정한 활동에서 유래하는 매우 고유한 방식의 고통 진정의 과정이자 평정의 과정이다. 고요함의 행복이 바로 불교가 주는 행복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것처럼 불교는 바로 기존의 행복관과는 다른 행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명상의 평정심을 통해 보여준다. 아래에 정리된 세 가지 행복관에서 불교가 제시하는 행복관은 세 번째 행복관에서 나타나는 평정심을 통한 행복이다. 물론 이러한 평정심의 행복에는 지성적 평정심과 명상적 평정심이 있는데 불교적 행복관은 후자의 평정심을 따르고 있다.

(1) 긍정적 정서 → 행복
-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2) 의미 있는 자기 성장적 활동 → 행복
- 유다이모니즘(Eudaimonism),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3) 평정심(tranquility of the mind) → 행복
- 지성적 평정심(에피쿠리아니즘[Epicureanism], 스토아 철학[Stoicism])
- 명상적 평정심(불교)

명상이 가져다주는 평정의 행복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마음의 고요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즉 고통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 감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통해 오히려 진정 작용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명상적 고요함의 본질인 것이다. 이 고요함의 행복은 궁극적으로는 긍정적 정서나 자기 발전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차별화된 깨달음의 길을 가는 행복인 것이다. 이러한 고요함의 행복은 변화하는 세상의 요동 속에서도 고통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열린 마음을 갖게 해주는 작지만 굳건한 행복이다.

불교의 행복관이 고통에 대한 진정 상태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언뜻 모순적인 듯이 느껴지지만 고통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행복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러한 행복관에 따르면 잘 사는 것은 긍정심리학에서 주장하듯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즐거움을 느끼는 성장이나 발전의 상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침잠해 겸손하게 깨달음을 향해가는 상태가 된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영속하는 실체적 자아를 부정한다. 즉 불교적 자기 성장은 자아의 본래적 성격[자기 영혼 혹은 자기 본래성]을 전제하는 유다이모니즘의 자기 성장과는 다른 종류의 자기 성장이다. 따라서 불교의 행복관에 관해서는 자기 성장론의 행복관과는 다른 시각의 행복관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4회에 걸쳐 소개한 <고통과 명상적 평정심>에서는 고통과 불교적 명상의 관계를 철학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불교에서는 고통이 매우 근본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고통이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인간 삶의 기본적 조건이며 현상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이런 고통은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대략 두 가지 서로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고통의 감각과 고통의 괴로움으로 이 둘은 보통 상호 연결되어 경험되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성격이 다르다. 고통에 관한 불교적 가르침이 이 고통의 두 가지 요소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은 불교적 명상(특별히 마음지킴 명상)의 진통 효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마음지킴 명상이 신체적 고통에 대해 분명한 진통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최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마음지킴 명상의 진통 효과의 성격이 매우 독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음지킴 명상의 진통 작용은 고통의 감각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혼란스러운 판단(두려움, 괴로움, 부담감)을 조정함으로써 명상이 고통의 강도를 감소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마음지킴 명상의 특징(일어나는 생각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본다는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인 것이다.

두뇌 영상술은 또한 명상 수행이 가져다주는 진통 작용의 특수한 입장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플라세보 진통 효과와의 비교에서 드러난 것처럼 명상의 진통 작용은 이성의 개념화된 과정을 통한 고통의 조정 작용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에 대한 집중을 통한 진통 작용이었다. 플라세보 효과처럼 생각이나 개념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바꾸어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의 현상에 집중함으로써 (즉 여기 지금 있는 상황에 집중함으로써) 나의 경험의 조건과 그 내용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이 이 진통 효과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명상을 통한 진통 작용은 불교적 깨달음과도 연결된다. 불교라는 종교와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지각과 현상적 경험에 대한 집중이라는 방향성은 불교적 명상에 잘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이 명상의 진통 효과라는 실용적 효과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불교적 철학은 독특한 행복론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행복에 관한 긍정심리학적 논의에 따르면 행복은 크게 긍정적 정서와 자기 성장적 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고통과 연관된 행복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고통이 인간 실존에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통의 시각에서 본 행복론 또한 가능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서양 철학의 전통 중에 고통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학파가 있다. 서양 고대에 나타난 스토아학파는 고통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마음의 평정을 지키도록 해주는 지성의 역할에 집중한다. 스토아적 행복은 바로 우주적 지성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마음의 평정이다. 이 평정심은 긍정심리학에서 말하는 긍정적 감정(즐거움이나 쾌락에서 유래하는 감정)이 아니고 지성적 이해를 통해 나타나는 정신의 균형 상태이다. 불교적 평정심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깨달음을 통한 담담한 마음이 바로 이러한 평정심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평정심은 지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경험의 뿌리(여기 지금 일어나는 감각과 지각의 과정과 조건들)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즉 불교의 행복은 명상적 마음의 행복인 것이다.

불교와 명상이 현대 과학을 통해 인간의 삶과 그 행복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지속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학제적 혹은 융합적 논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불교적 접근법일 것이다. 즉 가장 중요한 지식은 자신에 관한 지식이며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에 관한 깨달음이다. 행복은 바로 이 깨달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이들이 불변적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명상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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