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사유로 갈등 풀기 | 불교 지성에게 듣는 궁금한 불교

불교적 사유로
갈등 풀기

한길산
언론인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남북한 간의 이념대립을 포함한 복합적 갈등과 대립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념대립의 연장선상의 갈등과 아울러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갈등 문제들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역사를 해석하고 사회를 바라보고 설명하는 통속적 시각이 아닌가 합니다. 양분법적 사고가 사회, 정치적 현상을 규정하는 데 끊임없이 작용해 그 틀에서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추상적 사고의 허점에서부터 진영적 편가르기 성향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과연 이런 사고와 정신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이런 문제의식이 불교적인 사상과 정신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화쟁(和諍)과 화해의 실마리는 바로 이런 화두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도매금식 단정이나 설명 방식에 대한 의문이 없고서는 화해와 통합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설명하고 단정하는 방식에 대한 회의에서만이 그런 화쟁이나 화해, 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보통 20, 30대는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또 젊은이들의 성향이 꿈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며 그것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쪽입니다. 교과서나 고전에서 배운 것과는 동떨어진 현실에 불만을 가득 느끼게 되어 있고 이상을 지향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반면 50, 60대는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이뤄놓은 현실의 성과가 무너질까봐 혼란을 염려하고, 오랜 세월 경험에서 얻은 시각과 지식의 눈으로 보아 젊은 세대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상과 현실의 대립과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각자의 사유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궁극적 목표 가치보다 당면한 사안에 몰두, 집중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목표 가치면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양자 간의 차이도 분명 존재합니다. 또 짧게 보는 것과 길게 보는 것과의 차이도 있고, 새로운 것에 대해 강렬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과 안정에 대한 추구가 강한 사람의 차이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차이가 사회의 커다란 이슈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행동, 태도 속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미국 정치로 보자면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결일 수도 있고, 한국에서는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세력의 대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사색과 탐구를 잘하다 보면 불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나 과제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부모 자식 간에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태계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예를 보면, 부친의 살아가는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데다 제1차 대전 후 유럽의 조건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실존적 고뇌로 옭죄어왔습니다. 그래서 카프카는 그런 탈출구 없는 고뇌와 좌절, 절망 등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방식이 사물을 제대로 보고 해결하는 방식일까요? 붓다는 2,500년 전에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들도 이런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한때의 실패나 좌절과 고뇌는 새로운 해결의 단서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며 긍정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과 승리로 인해 오만으로 치닫고, 실패나 좌절을 겪어 분노, 증오로 치달아서 마이너스 효과만 낸다면 역사는 증오와 반목의 반복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증오와 반목이 아니라 새로움과 긍정의 자산이나 단서로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지 심도 있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아들이 선거에서 투표권을 포기하며 “엄마 아버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는 식으로 말한다고 칩시다. 부모로서는 아들을 충분히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나이든 세대는 전에도 정치나 선거에 무관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설령 자기가 관심이 없다 해도 부모가 원하는 게 있다면 부모가 원하는 방향을 따라드리기도 했는데, 요즈음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부모에게 별로 섭섭한 일이 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는 것은 상당한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세태를 보면서 기권할 때도 모든 후보들이 다 싫어서 투표할 대상이 없는 경우라면, ‘다 싫다’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났습니다. 투표장에도 가지 않고 기권하는 것과 나가서 기권하는 건 다르니 기권표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투표율에도 반영될 수 있으며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기권표가 많이 나오면 정치권에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철학자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는 “현대적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절대로 위대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리라는 걸 기대하지 말라. 결점이 있어도 웬만하면 집단적 지성을 잘 파악해서 구현할 수 있는 차선의 지도자를 뽑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새로움을 향한 충동이나 추동력을 가진 사람이 너무 적으면 아무리 지도자 개인이 잘하려 애써도 안 됩니다. 작은 조직의 리더가 아니라 국가 리더가 되려면 인재를 발굴하고 등용하는 데 더욱 현명한 지혜와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그런 지도층의 자리에 앉으면 시각이 더 제한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 개혁이라는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후보, 장관 후보 등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문화계, 시민단체, 예술가 등 민간에서 수많은 인재를 동원할 줄 알 때 변혁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인재의 풀(pool)이 다양하고 넓을 필요성이 절실한 데 한 두 지도자가 어찌 그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를 쓴 미국의 작가 에머슨(Emerson, Ralph Waldo)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식안을 제대로 구비하지 않은 수십만 명의 사람이 칭찬하는 것보다 단 몇 명의 제대로 된 안목을 지닌 이들의 상찬이 성공이라고 본다”라고. 붓다의 말씀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소통하려면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난 이런 데 관심 없어요” 하고, 기성세대는 “요새 애들은 틀려먹었어”라며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면 점점 대화의 기회는 없어집니다. 젊을 때는 자아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리고는 부모나 어른들에게 무조건 인간성이 좋아야 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기를 요구하지요. 자기는 젊으니까 서툴고 어리광부리는 게 당연하니 이해하라는 식입니다. 선진국 젊은이들에게선 이런 태도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곳에선 고교를 졸업하면 가정에서 독립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부모에게 등록금을 요구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대화도 많이 나누지요.

카프카는 젊은이 치고 너무 예민한 젊은이였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극단적으로 흐른 것뿐이고, 이 극단적인 예를 통해서 시대의 깊은 고민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감수성이 둔한 사람은 시대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누구나가 위대한 소설가나 철학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통 사람은 무능하기만 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도 위대해질 수 있는 자질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위대한 사람은 위대해지려 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된 거라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된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자식은 위대해지고 싶어 하지만, 위대한 사람의 자식은 오히려 평범한 생활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중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 임어당(林語堂)은 “농부의 아들은 재상이 되고 싶고, 재상의 아들은 농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위대함 속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속에도 행복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위대함을 한 번이라도 맛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평범함을 떨치고 모험을 하다 보니 때로는 불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위대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형적인 실존, 통계 수치, 지위 등으로 성공을 말하지 말자는 게 에머슨의 철학입니다.

우리 사회의 노년층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의식이 왕성한 세대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변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젊은 세대는 혁명을 원하지만 역사라는 건 그처럼 극적으로 곧바로 신속하게 진행하는 게 아닙니다. 몇 번의 구비를 도는 변곡점들이 있습니다. 타이타닉처럼 큰 배는 멀리서부터 빙산을 발견해야 하고, 빙산을 만날 것 같으면 상당한 거리를 두고 미리부터 서서히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의 이치가 그럴진대 소수의 젊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애쓴다고 이 거대한 국가 사회나 지구촌 사회가 하루아침에 크게 변하고 원대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혈기방장한 열정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없다면 역사에 진전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대외관계에서의 갈등이나 이해 대립문제 쪽을 한번 봅시다. 중국이 북한의 스폰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이해에서 비롯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국제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국가적,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대외관계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 외교 안보 정책 분야야말로 제대로 대처하려면 국내 정치에서 합의나 타협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국내 정치에서 합의를 봐야 비로소 대외적 외교관계 문제에서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정치적 리더십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이 서로 싸우는 줄로만 알지만 사실 알고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겉에서는 싸우는 척하지만 뒤로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봅니다. 우리나라 정치판도 계파 이익을 위한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전략적 두뇌를 대외관계에서 가장 잘 이용한 민족이 바로 신라인들이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대당관계를 잘해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그런 전략을 국내 정치의 권력싸움에만 활용하다 멸망하고 말았지요.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영국은 대외적인 관계에서 적과 동지 관계를 잘 배합해 정치를 합니다. 장사를 잘하는 민족이 정치도 잘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국익을 위해서는 해적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겉으로는 해적을 배척하고 소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결국은 이익을 위해 행동했던 것입니다. 물론 해적과 손잡는 일을 잘한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전략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말하는 겁니다. 이처럼 전략적 두뇌를 대외관계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조적이지 않으며 독선적 배타적인 이분법 논리에 빠지지 않고 갈등·대립하는 양자를 포용하면서 새로운 단계나 차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불교적 사유와 정신을 충분히 익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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