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열반도 가능할까? | 인터넷 가상현실 속 불교

디지털 열반도 가능할까?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메타버스가 불러온 새로운 인간
디지털 데이터 기술은 인간을 어디까지 변화시킬까?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데우스』에서 향후 기술 종교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욕망과 경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아닌 정보, 즉 데이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예견한다. 그 세계에서 모든 의미와 권위의 원천은 데이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그 데이터로 구현된 세계가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다. 메타버스를 이용하려는 인간이 메타버스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가상성에 적합한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증대 혹은 강화를 선택한다. 최근 전통적인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과 기계의 관계 설정에 대해 고민하는 트랜스·포스트휴머니즘 논의가 급부상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인본주의(humanism)를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에도 차이점은 존재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 기술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보다 증강된 생물학적 기체로 개선 혹은 향상하는 것을 추구하는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아예 정보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 이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포스트휴머니즘 둘 다 인본주의를 전제하지만, 탈(脫)인본주의를 선언한다. 그렇다면 그 변화된 인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혹은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 이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넘어서야 비로소 인간 아닌 존재, 즉 인공지능이나 새로운 기계적 존재들과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향상’과 불교의 수행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노화를 제거하거나 인간의 지적, 신체적, 심리적 능력을 크게 향상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사용해 인간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의 바람직함을 주장하는 지적, 문화적 운동”으로 정의한다. 물론 이러한 운동이 급부상하게 된 원인은 인공지능과 유전자가위 기술 등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의 혁신이 자리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른바 ‘인간 향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이보그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더욱 기술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의 상태가 어느 수준 이상이 되었을 때, 즉 인간의 한계로 여겨졌던 수명, 인지, 감정, 신체 능력 중의 어느 한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그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까. 여전히 인간의 규범적, 생물학적 지위를 가질까. 닉 보스트롬은 바로 이러한 존재가 ‘포스트휴먼’이라고 본다. 레이 커즈와일의 경우는 이대로 과학기술이 발전을 거듭하게 되면, 결국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신체를 완전히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해 새로운 메타버스 공간으로 이전하는 것을 시도하게 될 것으로 예견한다. 달리 말해서 생물학적 신체 속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디지털 데이터로 신체를 바꿔서 가상성을 확보하게 되면 불멸을 추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이른바 ‘마인드 업로딩’ 혹은 ‘디지털 업로딩’이라는 기술을 통해서이다.

디지털 열반?
전통적으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불교 철학과 여러 지점에서 접점이 있고 그 유사성을 주장한다. 일단 인간이 수행을 통해 깨닫고 열반에 이른다는 과정 자체가 ‘인간 향상’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구상과 겹치는 지점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른바 ‘인간 향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육체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불멸 혹은 영생 추구로 귀결된다. 그 사례 속에서 디지털 휴먼을 통한 인간들의 현실 도피 경향 혹은 탈신체화를 통한 불멸 추구가 마치 궁극적 인간 개선 혹은 향상의 최종 낙처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다.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디지털 LSD(;환각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주장은 대부분은 불교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서 비롯되고 막연한 추정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포스트휴머니즘, 그중에서도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에서는 탈신체화를 통한 불멸 추구가 인간 해방, 즉 불교의 열반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열반이 의도적인 탈신체화를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추구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모든 두뇌 정보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저장할 수 있다면, 팔정도나 사섭법, 혹은 열반에 이르기까지 불교 윤리적 가치나 깨달음마저도 디지털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원효가 포스트휴먼을 만난다면…
그렇다면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수행 체험을 디지털 복제하거나 구현하려는 시도가 불교 윤리적으로 문제는 없을까. 예를 들어 탈신체화를 통한 불멸 추구가 불교의 열반과 혼동되어도 무방한가. 『열반종요(涅槃宗要)』를 저술한 원효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원효가 이해하는 궁극적인 ‘무여열반’은 육체와 정신의 완전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신(法身)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즉 원효에게 있어서 세간 혹은 현실적 경험 세계 그리고 신체는 혐오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과 보살행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훌륭한 방편이 된다. 원효가 수행자들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듯이,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이 탈신체를 통한 불멸 추구도 초월에 대한 집착과 다름없을 것이다. 결국 원효는 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화를 통해 현실적 경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적극적 실천행, 즉 수행의 장으로서 세간을 바라본 것이다. 즉 원효는 열반을 현실 경험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 혹은 관념적 이상향으로 위상 지워지는 것에 반대하고, 중생의 삶과 역사가 전개되는 세간에 대한 긍정적 의미를 환기한다. 그 이유는 바로 현실 세계에서의 구체적 보살행을 통한 실천 교화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디지털에 기반한 메타버스, 마인드 업로딩과 같은 탈신체를 추구하는 기술일지라도 그것이 현실 경험 세계와 초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면서 현실 세계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 그 기술 구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도 또한 높아져만 가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신체는 그리고 현실 경험 세계는 기술을 통해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야만 하는 대상일까. 이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 혹은 AI 시대, 디지털 대전환 시대가 된 현시대가 불교에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 이번 호를 끝으로 <인터넷 가상현실 속 불교> 연재를 마칩니다.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으로 있다. 저서로 『AI 부디즘』이 있고,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禪)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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