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상원사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치악산 상원사

‘생명을 구한 종소리’
은혜를 갚은 꿩

그림 | 한생곤

치악산 구룡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아홉 마리 용이 구름을 풀어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라고 한다. 적덕과 적선은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배려하며 도움을 주고 자비 실천을 하는 것이다. 치악산에는 생명을 살린 종소리에 관한 보은 설화가 있다. 옛날 경상도 의성에 사는 한 젊은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괴나리봇짐에 활을 꽂고 험준한 치악산을 오르던 그 청년은 잠시 쉬면서 준령의 산 운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영산이로구나!” 바로 그때였다. 몇 발짝 거리에서 꿩의 울음소리가 절박함을 호소하는 듯 요란하게 들렸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밭이랑을 보았다. 그곳에는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향해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꿩은 구원을 청하는 듯 더욱 절박하게 “꺼억꺼억” 울어댔다. 청년은 활을 뽑아 구렁이를 명중시켰다. 구렁이가 붉은 피를 쏟으며 힘없이 쓰러지자 꿩은 잠시 머뭇거리며 꺽꺽 울어댔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뜻인 듯 좀 전의 울음과는 달랐다. 꿩은 몇 번인가 청년을 향해 울더니 훌쩍 날아가버렸다.
범종. 상원사에는 생명을 살린 종소리에 관한 보은 설화가 전해진다.

치악산 상원사 전경.

청년은 땅거미가 지자 걸음을 재촉했으나 산을 넘기엔 아직도 길이 멀었다. 인가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나무 밑에 낙엽을 펴고 하룻밤 쉬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청년의 눈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이 산중에 웬 불빛일까?” 청년은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앞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깊은 산중에 이렇게 큰 기와집이 있다는 것이 내심 의아했지만 우선 주인을 찾았다.

“뉘신지요?” 대문 안에서는 뜻밖에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 신세 좀 질까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대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지요.” “감사하오.” 청년은 대문을 들어서며 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절세의 미인이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이 산중에 홀로 지내다니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여인의 미모에 넋을 잃은 청년은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떻게 이런 심산유곡에 홀로 오셨나요?”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길입니다.”

“피곤하시겠군요. 저녁상을 차리어 오겠어요.” 잠시 후 밥상이 들어왔다. 밥상에는 먹어본 일이 없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청년은 식사를 하면서 궁금증을 풀려는 듯 이런저런 것을 묻기 시작했다. 여인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본래 강원도 윤 부자로 알려진 윤씨 댁 셋째 딸입니다. 갑자기 집 안에 괴물이 나타나 폐가가 되고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후 저는 이곳에 혼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거참 딱한 사정이구려.” “오늘밤도 괴물이 나올까봐 무서워 떨고 있다가 손님이 오셔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청년은 안방에 자리하고 잠을 청했다. 밤이 깊어지자 창밖에선 바람이 불고 멀리서 승냥이 울음이 을씨년스럽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손님!” 문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시오?” “무서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요. 윗목에 앉아 날을 샐 테니 들어가게 해주세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한방에서 자다니, 청년은 난감했다. 잠시 망설이던 청년은 여인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윗목으로 옮겼다. 여인은 수줍은 듯 등을 돌리고 옷을 벗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창밖엔 달빛이 휘영청 밝은데 여인은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조차 없었다. 청년은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 눈을 떴다. 그 순간 “악!” 하고 청년은 그만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을 징그러운 구렁이가 칭칭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빼려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구렁이는 더욱 힘껏 감아대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구렁이의 음성은 바로 절세미녀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냐?” “네가 낮에 활로 쏘아 죽인 구렁이의 아내다.”

“뭐… 뭐라고!” “너로 인해 남편을 잃었으니 오늘밤 나는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으로 둔갑했다. 이제 너를 물어 죽일 것이다.”

“살생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리됐으니, 제발 목숨만 좀….”

“만약 범종 소리가 네 번 울린다면 목숨을 살려주마.” 바로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딩!’ 하고 종소리가 울려왔다. “아니, 저 종소리가?” 종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지자 구렁이는 그만 힘이 빠지면서 당황했다. “딩! 딩! 딩!” 하고 종소리는 세 번 더 울렸다. 구렁이는 몇 번 몸을 흔들더니 스르르 몸을 풀어 방 밖으로 나갔다.

날이 밝아오자 청년은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보았다. “아니 이게 웬 꿩들인가?” 종루 아래엔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꿩 네 마리가 죽어 있었다. 꿩들은 자기들의 은인인 청년에게 보은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이다. 매우 감동한 청년은 꿩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다음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날짐승이지만 목숨으로 보은한 꿩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 그 절이 바로 적악산 상원사다. 이 전설에서 유래해 붉은 단풍으로 유명한 적악산의 적(赤)이 꿩 치(雉)로 바뀌어 치악산이 되었다고 한다.

치악산에 한 쌍의 구렁이가 나타나게 된 데에는 이런 설화가 있다. 상원사 주지 스님은 욕심이 많고 속인과 같은 데가 많았다. 어느 해 새로운 종을 만들기 위해 장안 십만 집에서 그 집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하나씩 거두어들였다. 처음에는 불심 그대로 종을 만들려고 했으나 견물생심이라 탐욕이 생겨 걷어들인 숟가락 중에서 절반쯤은 숨겨두었다. 그뿐 아니라 그중 절반만 들여 종을 만들었다. 높은 종각을 짓고 종을 매달아 거창한 시종식(試鍾式)을 갖게 되었다.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바친 시주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 큰 종의 첫 소리를 들으려 했다. 대중들은 큰 종의 모습을 보고 스님의 노고를 칭찬했다.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스님 공덕이 아니었던들 이렇게 큰 종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내용도 모르고 모두들 칭찬이 자자했다. 맨 처음 종을 치는 것은 스님이 손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연거푸 몇 차례 종을 쳐보았으나 바위를 때리는 소리만큼도 나질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천상에서 부처님의 엄중한 경책의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 스님은 그 업보로 구렁이가 되었다고 한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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