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 엥겔하트의 『죽음의 격』 | 정여울 작가의 '책 읽기 세상 읽기'

마음으로 준비하는 존엄한 죽음
『죽음의 격』

게이티 엥겔하트 지음, 소슬기 옮김, 은행나무 刊, 2022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에는 전신마비 증상으로 고통받는 주인공 윌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건강과 활기와 약혼녀와 정상적인 삶, 그리고 장밋빛 미래까지도. 그는 간병인이 없으면 먹을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는 삶을 몇 년간 지속해왔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부모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그의 상실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새로운 간병인 루이즈가 생겼고 그는 어느새 루이즈와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사랑에 빠졌으니 이제 비로소 삶의 의욕을 얻었으리라는 주변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진다. 그는 오히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존엄한 모습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 한다. 몸은 점점 나빠졌고, 극도로 허약해진 그는 아주 미세한 바이러스에도 감염되면 크나큰 위험에 빠지는 상태였다.

윌은 밥도 혼자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혼자 가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생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위스에 가서 합법적인 안락사를 선택하기로 한 윌의 결정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그제야 안식을 얻어 행복한 표정이다. 아무도 그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내 삶의 이야기를 나 스스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 마지막까지 자존감과 품위를 잃지 않고 싶은 윌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남겨진 사람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질지라도.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놓아주지 않을 수 없는 남겨진 이들의 슬픔까지도 윌은 모두 짊어지고 떠났다.

그런데 작가나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엉뚱한 주제로 고민을 시작했다. 저 남자는 돈이 많고, 여자 친구에게 남겨줄 유산과 편지까지 준비해놓을 정도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호화롭게 보이는 것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병원에 가서 그야말로 가족들과 여자 친구의 따스한 배웅을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만한 금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까지 다 갖추어진 우아한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허락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가려진’ 부분은, 주인공에게는 가족 모두가 스위스에 갈 비행기표와 여자 친구의 숙박비까지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데조차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돈’으로 환산되어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죽음의 격』을 읽으며 나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우리 현대인의 삶을 생각했다. 현대인의 모든 죽음은 의료 기관에 의해 관리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편안하게 집에서 죽을 권리를 잃어버렸다. 모두 병원에서 튜브에 연결되어 잔명을 부지하는 비참한 죽음을 원치 않지만,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그 어정쩡한 상태를 모두가 두려워하지만, 현대 의료 체계는 철저히 환자가 아니라 병원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환자나 노인이라는 사회적 취약 계층이 되는 순간, ‘죽음을 관리하는 산업’에 속하게 되는 것이고, 부당한 취급을 받을 위험에 노출된다. 더 나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권리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의 문제를 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복잡한 의료 체계의 희생양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이 갖추어진 나라에서도 긴 노년에 대처할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의약품은 어처구니없이 비싸고 환자는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한다. 65세 이상 미국인 중 약 10%가 이미 빈곤한 상태다. 메디케어는 노인 생활 지원 시설이나 자택 돌봄을 거의 지원하지 않아서, 노인이라면 다들 두려워하는 성인 위탁 시설이나 주에서 지원하는 요양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노인과 병자에 대한 사회적 방치는 코로나 시대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가고 있고, ‘돌봄’이 필요한 우리 모두의 노년에 대한 준비가 절실함을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다.

이 책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바로 ‘자기 서사를 완결할 권리’임을 이야기한다. 나의 이야기를 내가 끝맺을 수 있는 권리는 나 혼자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내 힘으로 아름답게 갈무리할 수 있는 자유를 향한 길은 아직 멀고 험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아름답고 품격 있게 삶을 마무리할 권리라는 화두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기를 꿈꾼다.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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