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취향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
김승현
그린 라이프 매거진 『바질』 발행인
커피 한 잔, 초콜릿 한 조각
날이 쌀쌀해지고 따뜻한 커피가 당기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대학교 때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했던 원두커피는 처음 맡아본 고소한 향에 매력을 느껴 마시기 시작했다. 혀에 썼다. 그래서 매일 커피를 물처럼 마셔대는 동기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많이 생기면서 나도 어느 순간 커피족이 되었다. 처음 마셨던 S 커피 한 잔은 몇 시간을 심장이 두근거리게 했지만 어느새 이 정도는 보리차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초콜릿도 그랬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 최애 간식 중 하나였다. 집중이 안 될 때는 우걱우걱 씹어 먹었고, 피곤할 때는 “당 떨어져”라고 외치며 초콜릿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 쌉싸래하다는 표현이야말로 초콜릿을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몸속 지방을 태워준다는 이야기에 씁쓰름한 맛만 남은 카카오 99%를 씹어 먹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커피와 초콜릿의 현실은 더 씁쓸했다.
취향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내 취향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존중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 취향은 존중해준다. 그렇다고 모든 취향이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담배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며, 멸종 위기 야생동물을 취식하는 일은 개인 취향이라 해도 비난받으며, 더 나아가 법적인 처벌을 받기도 한다. 아무리 개인의 취향이 중요해도 누군가의 고통을 담보로 하거나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직간접적 사회적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는 대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제한된다. 하지만 우리는 취향의 문제가 내가 속한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지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취향의 지구 반대편
십수 년 전 ‘공정 무역’을 처음 들었을 때, ‘무역이란 것이 원래 거래인데 공정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이 단어에 어떤 것이 숨어 있는지를 듣는 순간,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 초콜릿 한 조각이 우리나라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었다. 선진국에서 먹고 있는 비싼 초콜릿을 위해 하루에 초콜릿 한 개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카카오를 따고, 커피콩을 따기 위해 어린이들이 혹사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의 교육권을 외칠 때 이 아이들은 비쩍 마른 몸으로 교육은커녕 생존을 위해 매일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커피 맛을 알게 되면 일하지 않게 된다며, 커피 농장의 노동자에게 커피를 절대 맛보게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내 취향을 존중해 먹은 커피와 초콜릿이 누군가의 삶을 흔들고 있었다. 가능하면 그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지불한 곳의 커피와 초콜릿을 사 먹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최근 내 취향이 누군가의 인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지구의 위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난 달라졌다. 전 세계의 커피와 초콜릿을 위해 열대우림을 밀어 조성되는 농장과 그 과정에서 야생동물들이 살 곳이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열대우림이 사바나로 변하고, 물 부족으로 급수 차량에 의존해야 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과연 내가 취향이라며 즐긴 것이 옳은가 반성했다.
취향의 개편
우리는 여러 취향을 즐기며 산다. 그 취향은 자기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존중받길 원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사는 근간,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냐’라고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이 무너지고 나면 취향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취미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지구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아닌지 말이다. 나는 이제 커피와 초콜릿을 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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