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치: 달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소통과 통합

사랑과 정치
달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우성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남녀 사랑
남녀 사랑은 신중현의 ‘미인’(1974)이 잘 노래했다. 1절의 가사는 이렇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 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이 노래를 들으면 12연기설의 하반부가 떠오른다. 시각적 경험에 의한 세계(loka)의 생기인데, 다음의 표와 같다. (『초기 불교의 역동적 심리학』, 요한슨 저, 허우성 역,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6, p. 133)

‘미인’의 가사를 다음의 표에 적용하면 대략 이렇다. 한 남성이 우연히 한 여인(색)을 본다(촉). 좋은 느낌이 생겼다(낙수). 그래서 또 본다. 두 번 보고 난 다음에 자꾸만 보고 싶어진다. 애타는 사랑이 생긴 거다(갈애). 그 사랑이 취와 유를 통해 강화되다가 결국 생(사랑의 완성)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 생은 현생에서의 반복적 갱생으로, 또 내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각적 경험에 의한 세계(loka)의 생기

이 노래는 일상적이며 생물학적이다. 하지만 자유의 상실과 고통을 말하지 않아서 비현실적·비불교적이다. 자꾸만 보고 싶게 하는 업의 힘은 자유와 합리적 판단을 훼손한다. 다수의 남성은 한동안 하나의 미인을 두고 구부득고(求不得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를 경험할 것이다. 한 남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순간 온 세상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끼지만, 애별리고(愛別離苦)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생이 반복되면 노사의 고통도 다시 온다.

촉 이전에 무명,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가 있었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촉-수-애의 과정 전체가 탐진치에서, 홀연히 생긴 무명에서 나온 속박의 길임을 알지 못하니, ‘미인’은 범부의 노래다. 부처님은 그래서 “좋은 느낌(樂受)을 고(苦)로 보고, 나쁜 느낌(苦受)을 독화살로 보라”고까지 말씀하셨다.(『상응부경전』 4)

명색은 마음과 몸의 불이(不二)를 가리킨다. 이 불이론이 옳다면, 명색은 일반인에게도, 이성(理性)을 상정하는 철학자에게도 큰 도전이다. 느낌에서 독립된 이성의 존재가 잘 보이지 않아서다.

정치도 사랑의 일부다
미인의 자리에 정치인이 들어서고 남녀 큰 집단이 그를 숭배하면 정치적 팬덤이 생긴다. 강성 팬덤은 최소한의 합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정치인은 반복된 시청각 자극과 짧은 구호를 통해 팬덤을 선동하고 더욱 강성으로 키운다. 숭배자들은 자유의 상실을 의심하는 대신, 자기편의 승리를 욕망하고 다른 편은 혐오한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합리화하겠지만, 그 합리화에는 시청각 자극이 필수다. 이른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도 시청각 경험들이 필요하듯이.

갈등을 줄이는 세 개의 길
정치 진영 간에 갈등과 혐오를 줄일 수 있을까? 우선 세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나’의 존재 그리고 고수와 낙수를 주는 대상의 우연성을, 내가 하는 진리 주장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통과 행복을 주고받는 상호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다.

1) 우연성에 대한 자각
저 미인을 만난 것도 우연이지만, 애국심 같은 정치적 감정도 상당히 우연이다. 한국에 태어나면 한국을, 일본에 태어나면 일본을, 북한, 중국에 태어나면 각각 그 나라를 사랑하기 쉽다. 공통의 언어, 문화·역사를 배우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나 독재 국가에서는 관제 언론이 애국심과 개인 숭배를 만들어 국민들의 심신에 각인시킨다.

한국 정치인의 지지도 여론 조사의 경우, 변동성이 가장 작은 것이 출신 지역과 연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출신 지역과 연령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냥 왔다. 우리의 존재, 욕망과 혐오의 대상은 상당히 우연적이다. 오온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우리’를 넘어서 매 순간 공을, 부처를 실현하라고 한다.

2) 장님이라도 둘이 모이면 좀 나아지겠지
대상이 사람이든 사건이든 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상대적이다. 인도 자이나교도의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에 커다란 코끼리를 묶어 세워두고 다섯 장님을 불러들인 다음, 여기에 묶여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한 사람씩 코끼리를 만진 다음, 그들은 자신들의 지각(주로 촉각)에 근거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고 대답했다. 코끼리의 코를 만졌던 첫째 사나이는 그것이 거대한 뱀이라고 대답했다. 꼬리를 만져보았던 둘째 사람은 새끼(승, 繩)라고 대답했고, 셋째는 다리를 만지면서 나무둥치라고 말했다. 넷째는 귀를 만져보고는 체질하는 체라고 대답했으며, 다섯째는 한쪽 배를 만진 다음 벽이라고 선언했다. 제각기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며 격렬한 논쟁에 빠졌다. (『인도인의 길』 제2판, 존 M. 콜러 지음, 허우성 옮김, 소명출판, 2013, pp. 249-250 참조)

이 우화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실재에 대해 주장하는 어떤 지식도 한정되어 있고 상대적이니, 그 지식을 진리 전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장님들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사용한다. 나의 관점은 사회·문화적 조건, 사적인 이익, 희망, 공포에 의해 제한받고, 우리 자신의 감각적 수용기관과 지력의 한계에 종속된다. 우리 주변엔 왕도 진나(자이나교의 성자)도 없다.

단 하나의 관점은 ‘코끼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기 쉽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코끼리에 대한 진리도, 나의 한계에 대한 인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 셋이 모여 상대에 경청하면 코끼리-정견(正見)에 접근할지도 모른다. 이는 화쟁의 태도로서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상호 존재성의 인지
세 번째는 우리가 서로 고통을 주고받는 상호 존재(interbeing)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각성은 생존의 최후 보루다. 저쪽의 미움과 혐오가 우리 속에 있는 화, 미움, 혐오의 씨앗에 물을 주듯이, 우리의 미움과 혐오도 상대 속에 있는 화, 미움, 혐오의 씨앗에 물을 준다. 그래서 함께 불행해지고 아파한다.

나가는 말
우연히 만나 반려자가 되었다면 좀 달라도 인내와 존중으로 가정을 잘 지키다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존재 그리고 호오를 느끼는 대상의 우연성, 진리 주장의 상대성, 상호 존재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국민은 다투다가 나라는 망할 것이다.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모든 ‘장님’에게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다. 해방과 6·25전쟁 이후,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수용 정착시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한국은 이렇게 북한이나 중국과 다르다.

정치적 팬덤은 고수와 낙수 곧 대중 감정의 집단화에서 온다. 이때 합리적 판단은 마비된다. 편을 갈랐으니 그들에게는 불성(佛性)도 일심(一心)도 없다.

사랑: 좋은 느낌 → 연애/결혼 → 행복한 가정 → 아름다운 이별
정치: 좋은 느낌/나쁜 느낌의 집단화 → 합리적 판단의 훼손 → 불성이나 일심의 부재 → 무자비와 상호 고통

허우성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철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경희대 부설 비폭력연구소 소장, 경희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간디의 진리 실험 이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초기 불교의 역동적 심리학』, 『표정의 심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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