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참구법
수불 스님
안국선원 선원장
화두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직접 가리킨 말이다. 화두가 가리키는 진리 당처를 말끝에 즉각 깨달으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의심이 일어난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화두는 곧 의심인 바, 참선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 의심이 아주 또렷하게 들려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초심자가 처음부터 화두 의심을 실제로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학인은 선지식이 제시하는 공안을 자세히 살펴서 화두 의심을 면밀히 잡들어야 한다. 안목 있는 선지식이 인연 있는 학인으로 하여금 자성을 깨닫도록 시설한 장치가 간화선이다. 학인으로 하여금 바른 화두 의심을 일으키게 해서, 마침내 그 의심이 타파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선지식은 학인이 간절히 법을 물어올 때, 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담은 1,700 공안 중의 하나를 제시한다. 이때 학인은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닫거나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공안상에서 의심이 일어나야, 비로소 활구(活句) 화두가 시작된다.
참선하는 사람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활구를 들고 의심하는가?’, 즉 ‘화두가 제대로 살펴져서 의심이 활발하게 잡들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화두 공부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공안만 외우고 있다면, 그것은 사구(死句)이다. 공안을 제시받는 순간, 그 내용에 의문이 생겨 바로 화두가 걸려야 한다. 마치 독한 개가 한번 물면 이빨이 빠지든 목이 끊어지든 놓치지 않는 것처럼, 끈질기게 화두 의심을 지어나가야 한다. 한번 의심이 몰록 일어나면, 그 의심을 머리로 헤아려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온몸으로 부딪쳐나갈 수밖에 없다. 역대 조사들이 시설해놓은 이 관문은 생각을 통해 뚫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봉원묘(1239~1295) 화상은 “화두는 ‘고양이 본(本)’과 같아서 그 위에 얇은 종이를 놓고 자꾸 그려나가면, 언젠가 산 고양이가 튀어나온다”고 했다. 이처럼 활구 의심이 잡들어져서 일단 화두 길에 분명히 들어섰다면, 결정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공부 인연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학인은 의심이 걸렸다 싶으면, 그것에 집중해 공부가 더 깊숙이 온몸과 한 덩어리가 되도록 밀고 나가야 한다. 이럴 때 선지식은 더욱 채찍을 가해주어 화두 의심과 완벽하게 한 덩어리가 되도록 호법을 서준다.
눈 밝은 선지식이 믿음을 낸 학인에게 근본 문제를 제시해 그 자리에서 깨닫게 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의심케 해서 타파할 수 있도록 시설한 관문이 ‘조사관’이다. 화두는 곧 조사가 세운 관문인 것이다. 학인은 화두 의심을 통해서 관문을 돌파해야 한다. 선지식은 학인이 물어오면 은산철벽의 관문을 시설해놓고 그것을 뚫으라고 독촉한다. 이 조사관을 뚫으려면 뜻으로든 말로든, 마음길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 수 없는 한마디 의심은 사량분별의 번뇌 망상을 태우고, 생사심의 끝없는 윤회를 단칼에 잘라낸다. 그래서 활구 의심을 일컬어 ‘온갖 생각을 녹이는 용광로’라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부닥쳐 조사관을 한번 뚫어내지 않고서는 세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문이 생사일대사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눈앞에 가로막혀 있는 정신적 장벽인 조사관을 뚫으려면, 학인을 인도해줄 수 있는 근거를 가진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서 그 가르침을 따라 공부해야 한다. 조사관을 뚫어야만, 실상을 볼 수 있다. 조사관을 마주 대할 때는 반드시 간절해야 한다. 간절함은 불법과 선지식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예로부터 간절 절(切) 자 한마디가 참선하는 데는 가장 요긴한 말이라고 했다. 간절하면 머리에 불이 붙은 듯이 공부하게 되고, 그러면 잡념과 혼침 같은 ‘마’가 끼어들지 못한다. 진검승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가르치는 선지식이나 배우는 학인이 모두 독해야 한다. 그래야 정해진 기한 내에 끝낼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사실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눈뜨고 세상 떠난 이가 볼 수 있겠는가? 또는 마음이 본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보는 것일까?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은 학인으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해 의심하게 했고, 의심 끝에 깨달음에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핵심은 그 의심을 어떻게 잡들이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강조할 사항은 “공안의 문제가 제시되었는데, 왜 답을 찾지 않느냐?”이다. 앉아서 공안의 언구만 되풀이해서 외우고 있으면, 공부에 진전이 없다. 문제 그 자체는 간단한 것이어서, 일단 알아들은 다음에는 답을 찾으려고 진력해야 한다. 공안은 문제인데, 답을 찾지 않고 공안의 언구만 되풀이해서 외우고 있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이 화두다. 이 화두를 활구라고 한다. 활구가 들려지지 않으면 간화선이 아니다”는 확고한 입장이 서야 한다. 들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질 수밖에 없는 활구 의심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만 외우지 말고, 오로지 답을 찾아야 한다. 답을 찾다 보면 어느덧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고,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안개가 서린 듯 어두컴컴한 가운데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산철벽에 부딪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학인 혼자서는 이렇게 되기 어렵기에, 선지식이 처음 화두를 걸어줄 때, 학인으로 하여금 활구 의심에 확실히 걸리게 만드는 것이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소납 같은 경우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이렇게 의심을 걸어준다. 손가락을 튕겨 보여주면서, “무엇이 이렇게 하게 합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면 학인들은 “마음이 합니다”, “손가락이 합니다”, “내가 합니다” 등등의 답변을 한다. 이때 답변한 것을 모두 부정한다. 모두 다 알음알이일 뿐이라는 것을 납득시킨다. 그런 후에 본격적으로 문제를 낸다. “이렇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내가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하는가?” 하고 묻는다. 이때 답을 알려고 하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속에 걸리게 된다.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답 찾는 기운이 차오른다. 갑갑하니 알려고 하고, 하지만 알아지지 않으니 의심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 의심만을 놓치지 않고 집중하라고 다그쳐준다. 의심되어진 화두 하나만 붙잡고 집중하도록 만든다.
간화선은 선지식이 묻고 학인은 답을 찾도록 만든 장치이다. 화두는 온몸으로 들어야지 머리로 들어서는 소용이 없다. 답을 찾다 보면 정신적인 벽에 막히고, 그러면 사방이 조여오는 ‘금강의 감옥(金剛圈)’과 숨이 막히는 ‘목에 걸린 밤송이(栗棘蓬)’를 경험할 것이다. 문제는 알겠는데, 답을 알 수가 없어 기가 꽉 막힌 학인의 심정이 되어보라!
수불 스님
범어사 주지와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안국선원 선원장, 부산불교방송 사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간화심결 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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