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보는 언어폭력
법장 스님해인사승가대학 학감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일들을 마주하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며 하루하루를 함께 보낸다. 업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 속에서의 활동, 자신의 발언 등과 같이 다른 존재와의 마주함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앞에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이전에 우리 자신이 경험한 인연 관계의 연속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 즉 현실 속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삶이 비춰진 업의 거울인 것이다.
불교에서 업은 의도를 강조한다. 신구의(身口意)를 통해 표출되는 모든 행위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의 작용을 세 가지로 구분해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의 삼업(三業)이라고 부른다. 삼업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 있으나, 사실 우리는 살아가며 언제나 이 세 가지의 업을 동시에 짓고 있다. 무언가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그것에 의한 말을 한 뒤에 행동을 한다. 그러나 생각은 내 안에서 이뤄지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업의 작용이 밖으로 표출되는 첫 번째는 ‘말’에 의해서이다.
일상의 대부분을 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로 이어간다. 특히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며 그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 ‘대화’를 통해 소통한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의 모든 곳에서 사용되는 말이 결코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만 이끌고 가지는 않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가며 사람에 의해 상처받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악한 의도에 의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욱하는 마음에, 혹은 자신도 모르게, 혹은 지나치게 화가 나서 험한 말을 내뱉는다. 말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며 사회를 꾸리고 서로에게 의지처가 되어주어도 부족한데 이런 감정에 빠져 그만 자신의 입으로 독화살을 날려 다른 이에게 아픈 상처를 주는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입의 무게는 너무나 가벼워 조금만 방심이라도 하면 우리는 그만 말실수를 하게 되고, 그렇게 뱉은 말은 다른 이의 가슴으로 들어가 상처 자국을 남긴다. 설령 곧바로 참회를 하고 사과의 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던져진 말은 지워지지 않은 채 남겨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이런 말의 가벼움과 무서움을 주의시키기 위해 계율에서 구업에 관해 강조한다. 특히 초기 불교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보살계의 원형과도 같은 ‘십선계(十善戒)’에서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기어(不綺語), 불악구(不惡口), 불양설(不兩舌), 불탐욕(不貪欲), 부진에(不瞋恚), 불사견(不邪見)의 열 가지 불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한다. 이는 삼업을 중심으로 신업의 세 가지, 구업의 네 가지, 의업의 세 가지로 구성된 계율로써, 최초의 명칭인 ‘십선업도(十善業道)’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며 선업을 쌓고 불교인답게 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열 가지를 정리해둔 것이다. 이러한 계율 중에서도 유독 말로 짓는 구업이 가장 많다. 거짓말을 하는 것, 남을 속이는 것, 험한 말을 하는 것, 이간질을 하는 것, 이 네 가지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너무나 흔히 저지르는 말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가벼움으로 인해 아무렇지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십선계에서는 그런 흔한 말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 하고 바른 불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주의시키고 있다.
십선계는 선업을 쌓기 위한 계율이다. 즉 여기서 금지시키고 있는 것을 어기면 죄가 되어 악업을 만들지만, 반대로 잘 지키고 행한다면 선업이 되어 우리에게 공덕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거짓말이 아닌 바른 말로 대하고, 속이는 것이 아닌 공경하는 말로 대하고, 험한 말이 아닌 칭찬과 배려의 말로 대하고, 이간질이 아닌 화해와 화합의 말로 대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나쁜 말을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는다. (『숫타니파타』 제3-657)
자신이 내뱉는 말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인과에 의해 그 독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렇기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아끼듯이 다른 사람을 대하며 청정하고 환희로운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있지만, 그 기쁨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 공덕으로 회향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나온 험한 말이 스스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다.
쇠에서 생겨난 녹이 자신이 나온 쇠 자체를 갉아먹듯이 자신이 지은 죄의 행위가 그 사람 자신을 나쁜 곳으로 끌고 간다. (『담마빠다』 240)
우리는 모두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다른 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는 나 자신에게 건네는 한마디이다. 우리가 공경받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의 그 사람에게 공경과 행복의 한마디를 건네주면 된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우리의 삶이 항상 행복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로 변해가는 것이다.
법장 스님
2006년 일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2011년 비구계를 받았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수학 후, 일본 하나조노대 대학원에서 계율학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동국대 경주캠퍼스 겸임교수, 조계종 교육아사리, 일본 국제선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과학의 불교-아비달마불교의 과학적 세계관』, 『인터넷 카르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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