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는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 불교란 무엇인가

사성제는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불교는 붓다에 의해 처음 설해질 때부터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초지일관해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대명제를 내세우고 오직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 수행을 중요시하고 있다.

서양 철학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크게 주지 못하는 것도 관념적인 사변(思辨)에만 치우치고 뚜렷한 실천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고도의 철학적인 교리 체계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알맞은 실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성제이다.

불교는 실천 자세로서 중도를 중시한다. 붓다께서 정각을 얻고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콘단냐 등의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설법을 할 때에 이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중도에 대한 것이었다. 붓다께서는 쾌락을 탐하는 욕망의 추구도 버리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

붓다께서 부다가야에서 멀리 바라나시의 녹야원에까지 가서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려 할 때, 이들은 붓다가 고행을 버린 타락한 사문으로 생각하고 설법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붓다께서는 당신의 빛나는 얼굴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한 적이 있느냐고 하면서 이들을 설득했다.

『잡아함경』 가운데의 『전법륜경』에서는 붓다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출가한 자는 두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온갖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는 어리석고 추한 것으로 범부의 소행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됨이 없다. 또 하나는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이니, 이는 오직 괴로움만 더할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됨이 없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 ; 마음에 번뇌가 끊어져 고요하고 편안한 모양)과 증지(證智 ; 참다운 지혜를 체득하는 것)와 등각(等覺 ;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과 열반을 돕느니라.

이와 같이 중도라는 것은 욕망과 고행의 양극단을 버린 것을 말한다. 즉 쾌락과 고행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견해와 태도가 중도이다. 붓다께서는 이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성불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라는 것은 교리면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실천면에서도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도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인 연기와 공의 철학을 실천면에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양극단을 떠난다든가 집착을 버린다고 하는 중도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추상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실천면에서 더욱 자세하게 드러낸 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앞으로 설명하게 될 사성제 가운데 네 번째 항목인 도성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붓다께서 깨달았다고 하는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는 구체적으로 바로 이 팔정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성제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사성제(四聖諦)는 사제(四諦), 사진제(四眞諦) 등으로 일컬어지며, 고성제(苦聖諦)·고집성제(苦集聖諦)·고멸성제(苦滅聖諦)·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의 넷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 가운데에서 “성”이라는 말을 생략해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라고 하기도 하며, 단순히 고·집·멸·도라고도 한다. 사성제에서의 제(諦)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사트야(satya)의 의역으로서, ‘진리’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이론적이라기보다 실천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트야는 또한 진리 가운데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에, 사성제라고 하면 네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사성제에 대해서 『잡아함경』 가운데 『전법륜경』에 설해진 말씀을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고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고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이고[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이며[애별리고(愛別離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고[구부득고(求不得苦)]이다. 요컨대 취착(取着)하는 이 몸 자체가 고이다[오취온고(五取蘊苦)].

이것이 고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게 하고 쾌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는 고가 일어나는 원인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집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갈애를 남김없이 떠나고 멸하여 무집착인 것은 고의 멸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멸성제]이다.

또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라고 하는 이 여덟 가지의 신성한 도[팔지성도(八支聖道)]야말로 고의 멸에 이르게 하는 도에 관한 신성한 진리[고멸도성제]이다.

붓다께서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의 하나하나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실천 방도로서의 팔정도를 말씀하셨다.

또 『증일아함경』에서는 사성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도 붓다께서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처음 설법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제(四諦)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제란 괴로움의 범위에 의한 진리인 고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인 집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 멸제,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진리인 도제를 말한다.

이렇게 사성제에 대해 설명한 다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들이여, 이 사제에 대한 진리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진리로서 이를 들으면 통찰력이 생기고 사리를 꿰뚫는 지혜가 생기며 무명을 깨뜨리는 지혜, 깨달음, 광명, 진리를 꿰뚫는 지혜가 생긴다. 또 그것은 흔들림 없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으며 틀림없는 이치로, 부처가 설하는 바이기 때문에 네 가지의 진리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이 사성제의 여러 가지 공덕에 대해 말하면서 이 진리는 흔들림이 없고 진실하며 틀림없는 이치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실천을 위한 첫걸음이다.

붓다께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시고 성불하신 것은 연기법을 발견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십이연기를 관찰함에 의해 세계와 인생의 비밀을 깨닫고 해탈에 이르셨던 것인데 십이연기를 통해 스스로 마음에서 증득을 얻었다고 해 이를 ‘자내증(自內證)의 법문’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사제팔정도의 교법은 붓다께서 깨달으신 연기의 이치를 남들에게 쉽게 드러내기 위해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사제팔정도를 ‘화타(化他)의 법문’이라 한다. 이러한 두 가지는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자내증의 내용인 십이연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 화타의 법문인 사성제라고 이해하면 된다.

경전에서는 자내증과 화타의 법문에 대해 이러한 얘기를 남기고 있다.

붓다께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성불하신 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스스로의 깨달음을 검증하며 법락을 즐기고 계셨다고 한다. 연기의 도리는 너무나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이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어 생사에서 벗어난 지금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입멸에 드시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안 범천(梵天)이 붓다 앞에 나타나 그래도 이 세상 누군가는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설법을 해주시기를 간청했다. 이것이 이른바 ‘범천의 권청(勸請)’이라는 것이다. 이에 붓다께서는 처음으로 설법할 대상을 찾아 천안(天眼)으로 둘러보니 출가 초기의 스승이었던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좌선에서 일어나 이들이 머무르고 있던 녹야원이라는 곳으로 가서 처음으로 이들에게 설법한 것이 사성제였다.

사성제는 불교의 교리 구조를 단적으로 집약해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최승설법(最勝說法)’이라고도 한다. 사성제의 철저한 이해와 실천이 불교 공부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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