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의 세 가지 요소 | 간화선의 A에서 Z까지

간화선의 세 가지 요소


수불 스님
안국선원 선원장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이 있어서, 인연만 닿는다면 깨달음의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간화선은 온몸으로 화두를 타파해 불성을 확인하는 수행이다. 한바탕 달려들어 신심과 원력을 다해 화두를 들고 바르게 참구한다면, 누구나 근본을 밝힐 수 있다. 다행히 불조께서 이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제 깨달음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 불교를 알아가다 보면 처음부터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도 모르게 알음알이를 익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교 공부를 하면서 알음알이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일수록 발심해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천하에 의심하지 않고 깨달은 수행자는 없다”고 했다. 참선은 돈오(頓悟)에 생명이 있다. 돈오는 대승불교의 꽃이다. 알음알이가 끊어진 그 자리에서 참구해야 활구(活句)가 된다. 실참을 통해 식심(識心)이 끊어지는 분명한 체험을 직접 겪은 후라야, 비로소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업에서 홀가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선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이다. 첫째, 학인은 먼저 ‘화두법은 깨달음을 구하는 지름길[徑截門]’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불법의 안목을 여는 진실된 수행법으로서 화두를 믿고 온몸으로 활구의심을 타파하려고 애쓴다면, 한정된 기간 내에 공부를 성취할 수 있다. 화두와 화두를 걸어주는 선지식을 진실하게 믿어야, 화두 의지를 온몸으로 밀고나갈 수 있다.

둘째, ‘이 일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분한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무명 업식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경계를 대할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다니며 살았다.

인생이 항상 석연찮고 불만족스러웠으며, 가슴 한구석이 찝찝하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막상 화두와 인연을 맺었지만, 꽉 막혀서 도무지 갑갑하기만 할 뿐이다. 이럴 땐 저절로 울분이 치솟고, 오기도 나고 분통도 터져 나온다. 이때 선지식이 옆에서 염장을 질러주면, 뭐라고 할 수 없는 화 기운이 치솟는다. 이렇게 분심이 터져야 용맹한 추진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하는 데는 반드시 분심이 필요한 것이다.

크게 믿으면 크게 분심이 나고, 큰 분심에 크게 깨친다. 한번 화두를 결택했으면, 분한 마음을 일으켜 일도양단하듯이 그냥 밀어붙여야 한다. 일념만년(一念萬年)이므로, 생사일대사를 해결하려면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난 것처럼 분심 속에서 화두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화두가 바르게 걸리면 은산철벽 속에 갇히게 되므로, 학인은 관문을 세워놓은 불조를 원망하게 된다. 이처럼 바른 수행자라면 마땅히 불조께서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곳을 잡아내야 한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뒤에 매화가 피듯이, 보통 사람들의 오랜 악습은 용광로 같은 활구 속에서 단련되어야, 비로소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만나게 된다.

셋째, 화두 공부에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예 공부가 시작되지 않는다. 화두 의심이란 생사 문제나 자아 정체성 등 근본에 대한 의문을 말한다. 불교 공부를 웬만큼 한 사람이라면, 불법을 이치적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런데 왜 가슴이 시원해지지 않는가? 아는 것이 업을 녹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해는 하는데,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니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치는 빤한 것 같은데, 마음속의 답답함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 답답함이 바로 의심의 단초가 된다.

답답함이 일어나서 ‘근본에 대한 의문’이라는 하나의 일에 매진하면, 곧 화두 일념이 되어서 의심이 일어난다. 이 의심을 활구라고 한다. 활구란 화두상에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알려고 하는 의지 속에서 살펴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한 기운을 제대로 이어가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답답해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그런 경계 속에 들어가야 한다. 온갖 혼침과 산란, 역경계와 순경계가 닥쳐오는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의심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오직 화두를 놓치지만 않으면 이 모든 경계를 이겨낼 수 있다.

간화선의 핵심은 의심인 바, 화두를 놓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앞뒤가 꽉 막혀서 어떻게 해볼 수 없이 답답한, 이런 참 의심 속에 걸려들어 끝까지 뚫고 나가야 한다. 화두를 입에 물고서 염(念) 화두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관건은 화두를 한번 잡들여서 단시간 내에 끝낼 수 있어야 참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는 들자마자 꽉 막혀야 하고, 그 막힌 조사관을 뚫어야 돈오(頓悟)의 기회가 제공된다. 활구의심에 걸려들면, 그 속은 칠통처럼 깜깜해서 들어갈수록 더 막막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의심은 의정(疑情)으로 발전되고, 그 의정이 의단독로(疑團獨露)되는 입장에서 시절 인연을 기다리게 된다.

이 신심, 분심, 의심의 삼요를 갖춘 상태에서 선지식을 만난다면, 더 쉽고 빠르게 공부가 진행된다. 하지만 설사 그런 조건이 부족하더라도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이 학인에게 삼요를 일으켜준다. 학인에게 신심과 분심의 불을 지르고 나아가 화두를 걸어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끔 몰아쳐서, 마침내 은산철벽 속으로 몰아넣는다. 막상 화두 실참에 나아간 학인으로서는 나중에 공부가 한 고비 넘긴 후에야 비로소 신심이니 분심이니 의심이니 하고 돌아봐지지만, 실제로 선지식에게 걸려들 때는 그저 정신없이 몰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여유가 없다. 따라서 참선할 때는 삼요를 갖춘 활구 화두를 걸어주는 선지식을 만나는 데 승패가 달려 있다.

천 길 우물 속에 갇혀 오로지 살 길만 찾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을 지경으로 힘들다. 학인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렇기에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것이 선지식의 안목에 달려 있다. 인간은 매사에 만남으로 자라듯이, 화두 참선도 선지식이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공부 인연을 만나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요점이다. 첫걸음부터 활구의심을 잡들지 못하면, 간화선 공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만나자마자 활구 화두를 걸어주는 눈 밝은 선지식만 만난다면, 공부의 반은 성취된 바와 진배없다. 선지식을 찾아라!


수불 스님
범어사 주지와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안국선원 선원장, 부산불교방송 사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간화심결 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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