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연구 방법론과 공(空) | 불교와 과학의 세계

과학적 연구 방법론과
공(空)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1) 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

(2) 나무에 불이 붙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는다.

(3) 나무에 불이 더 붙으면 연기가 더 많이 난다.

불붙은 나무와 그것이 내뿜는 연기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위의 예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1)을 존재표, (2)를 부재표, 그리고 (3)을 비교표로 부르며 이와 같은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불과 연기 사이에 인과법칙적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와 같이 제시한 귀납적 연구 방법론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 숨겨진 메커니즘(hidden mechanism)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베이컨보다 22세기 전 붓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기 관계를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설명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이 공식은 원래 12지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점차로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었다. 붓다의 연기 공식은 베이컨의 (1) 존재표와 (2) 부재표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견상으로 비슷해 보이는 이 두 통찰은 철학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베이컨은 자신의 과학적 연구 방법론이 사물들 사이에 ‘숨겨진 메커니즘’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열(heat)이 일종의 운동(motion)이라는 점을 밝혀준다고 설명했다. 현대 과학으로 보면 옳은 분석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과 나가르주나의 공(空)에 관한 논의에 익숙한 불자들에게 베이컨의 설명은 아무래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베이컨이 말하는 ‘숨겨진 메커니즘’이란 먼저 (1) 사물에는 숨겨진 자성(自性)이 고정불변하게 존재하고, 나아가 (2)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법칙이란 이러한 자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 베이컨의 견해가 가진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물은 섭씨 100℃에서 끓는다.

이 자연계의 법칙(?)을 불교적으로 풀어 쓰자면 물이 지닌 자성과 섭씨 100℃라는 온도의 자성이 원인이 되어 끓음이라는 자성을 지닌 현상이 필연적으로 결과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자연과학자들도 위의 법칙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먼저 물은 아무 불순물이 포함되지 않은 증류수여야 한다. 불순물의 존재는 물이 끓는 온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기의 압력에 따라 물이 끓는 온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해수면의 높이에서 물에 열을 가할 때 100℃에서 끓게 된다고 설명한다(실은 섭씨 100℃라는 온도가 원래 이렇게 정의定義되었다). 기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 진공 상태라면 물은 열과 관계없이 즉시 기화되어버린다. 이와 같이 물, 100℃, 그리고 끓음이라는 현상은 모두 여러 조건과 관련되어서만 존재하고 또 이해될 수 있다. 조건과 관련 없이 존재하는 스스로의 본질적 속성, 즉 자성(베이컨의 ‘숨겨진 메커니즘’) 같은 것은 없다.

백보를 양보해 분자구조가 H2O인 물이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는 이상적인 상태에서는 100℃에서 끓는다고 해보자. 우리 사바세계에서는 그렇다고 하자. 사바세계에서는 물의 자성이 그 분자구조인 H2O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양자(量子)의 세계가 우리 사바세계와는 많이 다를지도 모를 도솔천에서는 물이 H2N의 분자구조를 가지고 사바세계의 H2O가 가진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바세계의 자연과학자들이 물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보는 H2O 분자구조조차도 물의 고정불변한 자성이 될 수 없다. 물의 고정불변한 자성이라면 도솔천에서도 H2O여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H2N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물과 같이 두 종류의 분자로 이루어진 사물은 근본적으로 집합체이고, 집합체가 자성이 없는 허깨비라는 점은 이미 불교의 『밀린다왕문경』과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여러 분자가 모여 이루어진 집합체가 아니라 단일 원소인 것조차도 그것이 더 작은 부분들을 가진 전체라면 이 두 논서의 예봉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소립자 세계의 입자도 그것이 다른 입자와 물리량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면 그 또한 여러 관계가 모여 이루어진 허깨비일 뿐이다. 자연 세계에 스스로 존재하며 자성을 지니는 사물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숨어 있는 자성의 존재를 파헤친다는 태도를 보여온 종래의 자연과학 연구 방법론은 성공할 수 없다.

단 하나의 반증 사례가 필연적으로 옳다고 생각되었던 자연법칙을 단숨에 거짓으로 판명 나게 할 수 있었던 경우들이 종래의 과학 연구 방법론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서양인은 ‘모든 백조는 희다’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고 믿었다. 어떤 새가 백조(swan)라면 그것은 ‘희다(white)’는 속성, 즉 ‘희다’는 자성을 고정불변하게 지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검은 백조(black swan)를 발견했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만으로도 그때까지의 확신이 모두 무너질 판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검은 백조가 많기도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빛이 직선으로만 진행하는 자성을 가졌다는 종래의 자연법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그것을 뒷받침한 관측으로 인해 모두 틀리다고 판명되었다. 필연적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정불변한 자성들 사이에 있다는 불변의 관계를 지칭할 텐데, 그런 자성들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소개한 베이컨의 연구 방법론은 그러한 자성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어서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붓다의 연기 공식은 단지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고, 그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의 존재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붓다는 자칫 오류를 범할 수도 있었을 극히 예민한 부분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지혜롭게 연기를 설명했다.

현대의 자연과학 연구 방법론은 다행히 베이컨이 범한 오류에서 벗어나 불교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과학자들 스스로도 더 이상 자신들의 이론이 영원히 고정불변한 사물의 본성(자성)을 밝혀내고 또 그것들 사이의 필연적인 법칙을 보여준다고 무리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과학 이론은 그 자체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단지 끊임없이 교체되는 가설의 체계일 뿐이라는 견해가 20세기 이래 과학계 전체에 더욱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제시한다. 이미 17세기 뉴턴부터 중력의 존재를 단지 가설로 제시한다고 분명히 했고, 19세기 다윈의 진화론도 가설로 제시되었다. 20세기 중반 왓슨과 클릭의 분자생물학도 그들의 DNA에 대한 이중나선형 구조 가설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모두 가설로 제시되었고, 그런 가설이 관측으로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가설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었다.

깨어 있는 현대의 과학자는 거의 모두 현재의 과학 이론이 아직 그 잘못됨이 밝혀지지 않아 잠시 폐기되지 않고 있는 가설의 체계일 뿐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가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로서 잠시 쓰이고 있을 뿐이어서, 우리는 그것에 어떤 고정불변의 자성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가설이 보여주는 사물의 속성 또한 영원히 고정불변한 자성이라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과학자와 철학자 모두 현재의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불교의 공(空)의 가르침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어 반갑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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