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휴먼, 욕망의 증장인가, 선교방편인가? | 인터넷 가상현실 속 불교

디지털 휴먼,
욕망의 증장인가,
선교방편인가?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실 미디어아트] 옛 승려와 만나다!
사진_국립중앙박물관

인류는 줄곧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품고서, 수많은 시도를 통해 그 실현을 꿈꿔왔다. 최근의 메타버스와 디지털 휴먼 기술은 인간 존재의 공간적 한계나 단일한 신체에서 오는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디지털 휴먼을 매개로 한 ‘탈 육체성’의 시도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휴먼을 가상공간, 즉 메타버스에서 활동하게 되는 아바타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휴먼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전에는 단순히 인터넷 공간에서 나를 상징하는 아바타가 활동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디지털 휴먼 기술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를 초월해서 두 세계가 상호작용, 즉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세계가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고, 인간의 일상 또한 메타버스 세계에서 구현되는 상태이다. 따라서 메타버스는 디지털로 구현된 가상(virtual)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관과 사유 방식이 현실과 단절된 허구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관통하고, 초연결(hyperconnected)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기술이 그러하듯 ‘디지털 휴먼’ 기술에도 명암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디지털 휴먼을 바라보는 양극단의 관점이 제기될 수 있는데,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기술이 인간에게 악업을 증장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측면과 대승불교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선교방편이라는 두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다.


욕망 증장의 도구로서의 ‘딥페이크’
선사들이 말하듯이, 사람들은 꿈속에서 꿈을 꾸듯 왜곡된 인식 대상에 허구를 거듭 더하게 된다. 『금강경』에서는 존재와 현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집착 없이 환영처럼 잠정적 상태로 볼 것을 설하고 있다. 확고부동한 실체라고 여기는 현실 세계조차도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디지털 데이터의 흐름에 기반하고 있는 메타버스나 디지털 휴먼 기술에 대한 시선 또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그 환영(maya)에 집착하거나 왜곡하고 굴절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구체적 실례가 바로 디지털 휴먼 기술을 악용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이다. ’딥페이크’는 일종의 영상 조작 기술을 말한다. 딥페이크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거짓(Fake)’의 합성어이다. 딥페이크 기술은 단순히 흉내 낸 모조품이 아니라 완전히 날조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 대선 직전 유튜브에서 유포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트럼프 비하 동영상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사실은 동영상에 등장한 오바마는 오바마의 얼굴, 손짓, 목소리까지 완전히 복제한 가짜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만약 일반 대중에게 미리 가짜 오바마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인공지능 딥러닝과 디지털 휴먼 기술이 결합했을 때, 그 경이로움 만큼이나 위험성도 비례한다. 인간의 욕망과 파괴적 본능 충족을 위해 디지털 휴먼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는 경우, 디지털 휴먼은 기만과 파괴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지털 휴먼은 인간의 욕망이 현실 세계에 더해 가상 세계까지 몇 겹으로 구축해가면서 악업의 깊이를 더해가는 도구가 될 위험성이 크다.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서의 디지털 휴먼; 여환자비(如幻慈悲)
디지털 휴먼 기술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길 수 있다는 위험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나 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한다는 장점을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방편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선교방편(upāya-kauśalya)’이란 대승의 부처와 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맞게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활용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즉 중생 구제뿐만 아니라 수행자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다. 인간의 육근은 외부 인식 대상에 노출됨으로써 끊임없이 탐욕과 집착을 낳게 되므로 그 육근을 잘 보호하고 간수하는 것에 주안을 두었다. 그 자체로서 수행이자 수행자의 일상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그 동기와 귀착점이 될 수 있다면, 방편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러한 방편도 운용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서는 교화 방편의 수단으로 다양한 형태의 공간과 등장인물을 빛과 그림자로 구현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세주묘엄품」에서는 아난이 부처가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의 광경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 장엄을 일일이 묘사하면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서 도량의 모든 장엄을 영상으로 비치게 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현재의 기술로 바꿔 말하자면, 홀로그램이나 메타버스의 구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법화경』 「화성유품」에서도 선교방편으로 환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진귀한 보물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을 인도하던 한 사람의 도사가 피로에 지치고 두려움에 빠진 일행을 위해 환술로 환상의 성을 만들어 휴식을 취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이 일화에서의 인도자는 일종의 메타버스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대중의 집단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편을 쓴 셈이다.


공성(空性)과 디지털
디지털 휴먼 기술이 불교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공성(空性)에 기반한 사물의 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이해와 디지털에 기반한 기술들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속성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합의 정도가 높을수록 이 기술을 통한 경전적 이해와 상상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불교가 디지털 휴먼 기술 개발에 통찰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휴먼을 이해하려면 중도적 안목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디지털 휴먼 기술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고려하는 와중에, 이 기술은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메타버스, 블록체인, NFT 등의 기술이 하나씩 일상에 파고들면서 우리의 전통적 이해와 가치를 부지불식간에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우리의 가치가 기술에 반영되지만, 반대로 기술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거대한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매 순간 각각의 기술 변화가 가져오는 영향과 그 의미에 대한 다각도의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디지털 휴먼을 욕망의 도구로 활용하는 부정적 기능과 선교방편의 도구로 쓰는 긍정적 기능을 모두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인류가 그러한 성찰을 소홀히 한다면 기술 만능주의는 혁신 단계마다 새로운 철학과 만나고 연계하면서, 인류가 애초에 상상했던 번영과 공생의 지점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에 가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기술은 과거처럼 단순히 인간의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생존 조건으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기술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설정은 향후 미래의 숙제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 삶의 문제이다. 만약 과학기술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고통으로 귀결될 것이 명확하다. 불교가 이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으로 있다. 저서로 『AI 부디즘』이 있고,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禪)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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