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C. 테일러의 『침묵을 보다』 | 정여울 작가의 '책 읽기 세상 읽기'

침묵 속에서 

‘참 나’를 발견하다


『침묵을 보다』

마크 C. 테일러 지음, 임상훈 옮김, 예문아카이브 刊, 2022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다가 가끔 즉흥적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써 내려가는 과제를 내줄 때가 있다. 이번 과제는 이것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에 대해서 써보라.” 그 과제를 내준 것은, 내가 그때 견디기 힘든 상대방의 침묵으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즉흥적인 과제를 내주었더니 결과가 오히려 좋았다. 견디기 힘든 침묵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모두가 평소보다 더 나은 글을 제출했다. K는 ‘헤어지기 직전, 남자 친구의 침묵’에 대해 썼다. 그날 유난히 자신에게 말을 걸기 힘겨워하는 연인의 괴로운 얼굴을 보고, 그의 견딜 수 없는 침묵에서 이제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침묵은 관계의 마침표를 의미하는 확실한 신호였다. 이별을 먼저 통보하기 힘들어하는 남자 친구의 침묵이야말로 그 안타까운 연인들의 마지막 소통이었다. 때로는 침묵이 이렇게 ‘떠들썩한 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침묵을 보다』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더 깊은 인생의 진실과 만나는 우리 인간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시각예술은 침묵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다. 케테 콜비츠의 수많은 작품들은 아무 말없이, 비명이나 절규조차도 없이, 죽은 아들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 고통스러운 침묵의 포옹 속에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깨닫는다. 아들이 본인의 의지로 참전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부모의 고통, 하루하루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버린 순간, 그때부터 영원한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부모의 고통을 관객도 함께 느끼게 된다.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침묵은 때로는 고통의 견딤이나 슬픔의 억누름이기도 하다. 이제 막 시작되는 연인들의 첫 데이트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고를지 몰라 망설이는 침묵은 설렘과 두근거림의 신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침묵은 커다란 빛을 발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미디어의 각종 정보를 급하게 섭취하느라 침묵의 뉘앙스를 읽어내는 데 자주 실패한다.

침묵이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이유가 있다. 한 번도 제대로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을 갑자기 생각해봄으로써, 그동안 돌아본 적 없는 삶의 귀중한 측면을 엿볼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은 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라는 멋진 과제를 내주셔서 감사해요. 그 과제 때문에 제가 그동안 왜 힘들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삶을 돌아보는 글쓰기가 왜 치유의 효과가 있는지 알겠어요.” 그 학생의 ‘침묵’ 때문에 나는 ‘내 수업이 재미없나?’ 하고 의구심을 가졌는데, 역시 그 침묵마저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나 보다.

그런데 모든 침묵이 깊고 진지한 통찰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가볍고 사랑스러운 침묵도 있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살짝 벌린 입술 속에 깃든 달콤한 평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 설렘과 긴장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 팽팽한 공기 속에서 몇 초간 지속되는 상쾌한 침묵. 이런 달콤한 침묵 또한 내게는 아름답고 소중하다.


미셸 세르는 이렇게 썼다. “(…) 언어는 시간을 죽이지만, 침묵은 황금 혀보다 더 황금빛이어서 우리의 유일한 진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천둥 같은 언어와 감각의 위협으로 굳게 봉인되어 있던 감각에 충격을 주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 『침묵을 보다』 중에서


저자는 또한 침묵이야말로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수많은 소음과 소문 속에서 괴로워할 때,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최고의 세러피는 침묵 속에 잠기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나아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요즘 침묵 속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 모든 사회적 껍데기를 벗고 비로소 투명하고 솔직해진 나 자신을 만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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